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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 장재형목사

 

1.시편 41편과 요한복음 13장
요한복음 13장 18-19절에 등장하는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 말씀의 구약적 배경인 시편 41편에 대해 장재형목사의 설교를 중심으로 묵상을 한 글이다. 먼저 요한복음 13장 18-1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구절은 시편 41편 9절의 인용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떡과 잔을 나누어 주시며, 곧 다가올 자기 죽음의 의미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를 강조하신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시며,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고 하여 주님의 사랑을 배신할 자가 있음을 선언하셨다. 이것이 바로 가룟 유다를 가리키는 말씀인데, 이때 예수님께서는 시편 41편을 떠올리시며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라고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신다. 이는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제자들 중에 하나가 가장 비극적인 배반을 결심한다는 상황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편 41편은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안에는 매우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장면들이 묘사된다. 특히 9절의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는 대목은 배신당하는 자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당시,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해치려 하는 원수들뿐만 아니라, 함께 식탁에서 떡을 나누며 친밀함을 나누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로, 함께 음식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특별한 친밀감과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친밀감을 저버리고 "발꿈치를 들었다"는 표현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모욕적인 행동을 드러내며, 이는 곧 폭력과 분노, 그리고 배반자의 사악한 의도를 함축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예수님의 행적과 결부하여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자신의 희생을 미리 예고하셨고, 또한 그 희생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 주셨다. 발 씻김의 행위는 당대에 종이 해야 할 낮은 봉사 중 하나였는데, 주님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섬김의 본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심으로써, 장차 자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을 위해 내어 주시는 희생의 예표를 마련하셨다. 그런데 이토록 깊은 사랑의 교제와 은혜의 만찬이 펼쳐지는 현장 가운데, 한편에서는 배신이 서서히 싹트고 있었다.

가룟 유다는 '내 떡을 먹는 자'이면서도, 동시에 '발꿈치를 드는 자'가 되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 속에는 함께 떡을 먹는다는 친밀성, 그리고 그 친밀성을 한순간에 깨뜨리는 배반자의 포악함이 동시에 담겨 있다. 사람과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나누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유대 문화에서 식탁 교제는 가장 깊은 우정과 형제애, 사랑을 전제한다. 그런데 바로 그 식탁의 은혜로운 자리에 함께했던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길 결정을 한 것이다. 그가 그 순간 발꿈치를 들어 밖으로 나가버리는 장면은, 요한복음 13장 후반부에 "그가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고 묘사될 정도로 어둠의 상징적 모습과 맞물린다. 영적인 빛이신 예수님을 떠나, 배반의 어둠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유다의 모습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이 가진 슬픔과 충격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시편 41편에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구절(1절)을 볼 때,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들을 권고해 주신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곧,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위치를 취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약함을 감싸 주시고, 인간적인 부족함과 죄성의 문제를 돌이킬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다를 끝까지 권면하시고 권고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계셨음에도, 그에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셨다. 바로 떡을 함께 나누며 기회를 주셨고, 발을 씻기시며 돌이킬 길을 열어 주셨으나, 유다는 자신 안에 일어난 탐욕과 배신의 마음을 뿌리 뽑지 못했다. 그 결과로 그는 주님을 배신하는, 가장 비극적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장재형목사는 유다의 사례를 통해 오늘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침륜을 경고한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자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에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직접 체험했다고 해서 반드시 완전한 믿음을 가진다는 보장은 없다. 심지어 사역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할지라도(유다는 돈궤를 맡았던 회계 역할을 했으며, 주님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은 제자 중 하나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변질이 시작될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스스로를 늘 살피고, 성령 안에서 회개와 자복을 통해 주님과의 친밀함을 지켜 나가야 한다.

시편 41편 4절에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라는 탄원이 나오는데, 이것이야말로 유다가 드렸어야 할 기도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장재형목사는 누구든지 죄를 지을 수 있고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강조하되, 문제는 넘어졌을 때 다시 돌이키지 않고 방치할 경우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 버린다는 점을 주시한다. 죄를 짓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죄를 짓고도 그것을 자복하지 않은 채 오히려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속이거나, 주님과의 교제에서 멀어지는 선택을 해 버리는 것이다. 유다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배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가 돈궤를 맡으며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들 가운데 자기 기대와 다른 점들이 생겼을 때, 분노와 배신의 정서를 품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그 마음이 점점 더 곪아 들어가 어느 시점에는 돌이킬 수 없는 배반으로 이어지고 만다.

이에 반해, 시편 41편에는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라는 구절이 있으며(1절), 이는 하나님이 끝까지 기회를 주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심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유다를 향해 그것을 몸소 보여 주셨는데, 사랑의 발 씻김으로 그를 한없이 낮아진 모습으로 섬기셨고, 떡을 주시며 끝까지 그와 함께 하시려 하셨다. 그런데 유다는 그 마지막 호의와 사랑의 권면조차 외면하고, 밖으로 나가버리며 어두움 가운데로 사라진다. 이 비극적 장면은 구약의 다윗이 경험한 고통스러운 배신을 예수님께서도 새롭게 체험하신다는 점을 부각해 준다.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내적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십자가'를 감당하셔야 했는데, 그 길에 가장 가까운 동행자로 지내던 자가 등을 돌리고 배반한다는 사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묵상할 때,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겪으신 '십자가의 외로움'과 '십자가의 쓰라림'을 가슴 깊이 느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누구의 위로도 의지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제자들마저도 이해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뿔뿔이 흩어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까지 했다. 그 가운데 유다의 배신은 가장 치명적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슬픔을 극도로 심화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한다.

시편 41편 9절에 묘사된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는 표현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쓰라린 현실이었을까. 본래 이 말씀은 다윗이 처한 상황에서 비롯된 시지만, 예수님께서 직접 그 말씀을 인용하시며 당신이 그 예언의 완성임을 알려 주신다. 다윗과 예수님의 공통점은, 가까운 자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과 예수님의 차이점이라면, 다윗은 자신이 배신당하고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배신을 택한 유다까지도 끝까지 품고, 그를 위해 죽으실 길을 가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중보하시기까지 한다. 이것이 예수님 사랑의 절정이며, 동시에 인간의 죄악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다와 같은 마음'이 없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주님으로부터 수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어느 순간에 그분께 등을 돌리고, 교제와 사랑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배신의 씨앗, 분노나 울분, 불만과 탐욕 등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이 병들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이를 위험이 다분하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조금씩 망각했고, 그의 시선은 돈과 세상의 이익, 혹은 정치적인 야망이나 실망감에 붙들렸을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주님을 팔아넘기는 가장 파괴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시편 41편 4절에서 시인은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라고 간구한다. 이는 본인이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죄로부터 돌이키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가 이런 기도를 드렸다면, 역사와 구원의 흐름은 또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다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예수님의 마지막 권면조차 외면하며, 사탄이 심어 준 생각과 탐욕을 따라가 버렸다. 결국 그에게 남은 결말은 참혹했다. 배신이 가져다준 죄책감과 영적 파멸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리까지 내몰렸다. 이 모습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럼에도 장재형목사는 시편 41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를 강조한다.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2절)라는 간구처럼, 하나님께서는 돌이키는 영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약속이다.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유다를 향해 사랑을 보이셨고, 그를 붙드시려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가리키는 최종적인 진리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누구나 사함을 얻는다. 그 어떤 심각한 죄라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를 주님은 용서하시고 새롭게 세우실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스스로 돌아오길 거부할 때, 하나님의 자비도 그 의지를 강제로 꺾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유다는 그 거부감 속에서 영혼이 망가져 버렸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는 중요성을 일깨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유다를 붙들고 간절히 회개하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예수님만이 유다 안에 자라고 있던 악한 의도를 꿰뚫어 보고 계셨는데, 다른 제자들은 거기에 무지하거나, 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함께 예배하고 섬기지만, 어느 누군가의 마음에 심각한 의심, 불평, 탐욕, 분노 등이 쌓여 가고 있다면, 믿음의 공동체는 그것을 함께 기도하며 돌이킬 기회를 줘야 한다. 스스로 깨닫지 못할 때, 주변 형제자매들의 신실한 권면과 위로, 사랑이 필요한 법이다. 만약 이를 방치한다면, 유다의 배신이 다시금 재현되는 비극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단순히 '유다의 배신'이라는 비극적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의 심령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영적 배반의 위험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회개의 길과 보호의 은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을 베푸시고, 최후의 만찬 직전부터 유다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이셨다. 비천한 종의 자리까지 내려가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강권하셨다. 이 놀라운 은혜의 현장 한가운데서, 유다는 차마 그 사랑을 마지막까지 체험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늘 겸손하게 살피고, 성령 안에서 부단히 깨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시편 41편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인은 자신의 상태가 쇠약하다고 호소하고, 병중에 있다고 표현한다(3절). 영혼의 병이 깊을 때 우리는 제 발로 일어설 힘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병상에 찾아오시고, 우리의 자리를 고쳐 펴신다. 예수님께서도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그들의 '영적 병'을 고치셨다. 예수님이 친히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영적으로 병든 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무너진 마음을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병들었을 때, 스스로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즉시 주님 앞에 나아가 고침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 길이며, 유다와 같은 배신의 길을 걷지 않는 비결이다.

끝으로, 시편 41편 9절은 예수님과의 식탁 교제를 함께 누렸으면서도 주님을 배반한 유다의 모습과 완벽하게 오버랩된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굳이 언급하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당신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이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요 13:19)라고 하셨다. 즉,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겪은 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확실히 믿게 되도록, 사전에 예언을 밝히셨던 것이다. 한편으론, 유다가 나간 이후 제자들은 세상에 대한 사명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고, 결국 주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교회가 탄생한다.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의 고통을 깊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구원의 역사 안에서는 예정된 일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완성 단계로 접어들고,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성육신 하나님으로서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신다. 우리가 이런 큰 그림을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 안에 혹시라도 발꿈치를 드는 배반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지 두려운 마음으로 점검하고, 주님께 나아가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 13장 18-19절과 시편 41편이 현대의 성도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경고이자 권면으로 다가오는 핵심이다.

2. 유다의 배반과 교회 공동체의 과제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목회 현장에 적용할 때, 오늘날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주목한다. 그는 특히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구절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심정과, 그 심정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둔감함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인간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셨고, 그중에는 경제적인 일을 맡길 정도로 신뢰했던 유다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거리에서, 동일한 말씀을 듣고, 동일한 기적을 경험한다고 해도, 영혼 깊은 곳에서 이미 탐욕이 자리 잡은 경우라면, 언제든지 배신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유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후 제자들은 유다의 행보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한 제자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거나 유다를 붙들어 세우려는 시도는 하지 못했다. 어떤 제자는 유다가 가난한 자를 돕거나 무언가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간 것으로 짐작했다. 이는 곧 제자들이 동료의 영적 상태를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했고, 공동체 안에서 마음을 함께 나누는 깊은 교제가 부족했음을 보여 준다. 사실 영적으로 민감하고 서로를 돌보는 태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유다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만과 의심을 미리 포착하고 회심의 계기를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모습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빈번히 재현된다고 말한다.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에 참석하며, 봉사까지 하는 이가 어느 순간에 깊은 배신이나 영적 타락으로 교회를 떠나거나, 극단적 경우에는 공동체에 큰 피해를 주기도 한다. 그렇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본인은 마음속에 오래된 상처나 불만을 쌓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며 별 문제가 없다고 안심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기도해 주는 지속적이고 진실한 교제가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사건이,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치닫고 만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말씀이 주는 의미는, 같은 식탁을 함께 나눈다고 해서 항상 서로 마음이 통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안타까운 진실을 환기시킨다.

실제로 유다 역시 제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3년 넘도록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며,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듣고, 선교 활동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겉보기에는 예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돈궤를 맡아 관리한다는 것은 제자들 중에서도 비교적 신뢰를 많이 받은 위치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유다는 안으로는 탐심을 키워 나갔고, 결국은 이 탐심이 '은 삼십'이라는 상징적인 대가와 맞물려 예수님을 파는 배신으로 이어졌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주며, 공동체 안에서는 눈에 보이는 행동만으로 상대의 영적 상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오히려 진실한 교제와 영적 민감함, 성령 안에서 서로 권면하고 책망하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교회 안에서 치명적 균열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자세다. 예수님은 이미 유다의 마음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 예수님은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대하셨고, 발을 씻어 주시며 그를 향해 사랑을 베푸셨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라는 시편 41편 1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영적으로 빈약하고 병든 유다를 끝까지 권고하셨다. 그러나 결국 유다는 예수님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둠으로 나가 버린다. 이것이 신적 사랑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비극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죄인을 향해 손을 내미셔도,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면 구원의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유다는 바로 그 거부의 전형이 되었고, 그 끝은 극단적 파멸이었다.

이 장면에서, 장재형목사는 목회적 적용점이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교회 지도자이든 평신도이든, 누군가가 범죄의 길을 가고 있음을 감지했다면, 끝까지 권면하고 품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완고하게 돌이키지 않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예수님처럼 사랑을 다하며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고, 영적인 경고를 전하는 것이 옳다. 동시에, 배신이나 분쟁을 일으키는 당사자를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으로 정죄하고 내쫓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공동체를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기에, 균형을 잡기 위해 지혜가 요구된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사랑으로 섬기고 끝까지 돌이킬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아울러,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세도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제자가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으며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는 기록이 또 다른 복음서에 나온다. 이는 성도가 가져야 할 기본적 태도다. "혹시 내가 주님을 배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안에 주님께 대한 원망이나 불만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과연 주님의 사랑을 진실로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 봐야 한다. 우리는 적어도 가룟 유다처럼 주님을 대적하는 길로 치닫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날마다 성령 안에서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더해, 자신이 주님과 멀어지고 있다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즉시 멈추어 서서 주님께 자복하고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더욱 완고해지고, 합리화와 자기기만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시편 41편에 나타난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라는 호소는, 신앙 생활을 하는 누구에게나 매우 긴요한 기도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날마다 회개가 필요하다. 동시에, 교회 공동체는 죄인들이 모여 함께 회개하고, 함께 치유받고, 함께 성장하는 영적 병원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낮아짐과 섬김의 모습은, 성도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시사해 준다. 가장 연약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찾아가 섬기고, 그를 권고해 주며, 회개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이 교회가 감당해야 할 기본 사명이다. 이런 사명을 잃어버릴 때, 교회 안에서 유다와 같은 영적 배신자들이 양산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본문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나는 정말 주님의 떡을 먹으며 감사하는가, 아니면 언젠가 발꿈치를 들 배반자가 될 위험을 품고 있는가?"라고 해석한다. 이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교회 전체가 고민해야 할 물음이기도 하다.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배와 성찬에 참여하며, 주님의 은혜를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교회가 이 성찬의 신비를 반복해서 경험하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결국 형식만 남고 실질은 사라져 버린다. 진정한 감사와 기쁨 없이 성찬을 거듭하다 보면, 마음은 점차 굳어지고, 외식적인 습관만 남는다. 그러면 언제든지 발꿈치를 들며 주님을 등질 수 있는 영적 상태가 되고 만다. 이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은 생명의 떡이고, 주님의 피는 영원한 구원을 상징한다. 성도들이 성찬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어떤 죄인이었으며, 주님께서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기억하는 경건의 마음이 필요하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목회자들이 성찬 예식을 집례할 때, 반드시 성도들에게 그 의미를 상기시켜 줘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 떡은 주님의 몸이요, 이 잔은 주님의 피라. 이것을 먹고 마시는 너희는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성찬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내면화하고, 그분을 따라 살기로 결심하는 자리다. 그런데도 성도들이 이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저 주일에 제공되는 형식적 절차로만 그칠 위험이 있다. 그러면 아무리 자주 성찬에 참석한다 해도, 영혼은 예수님과 더욱 멀어질 수 있다.

가룟 유다는 실제로 주님이 주시는 떡을 받았고, 최후의 만찬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 떡이 내포한 사랑과 희생의 메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곧장 일어나 어둠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성찬을 잘못 받는 자의 극단적 사례다. 교회 공동체는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성찬과 예배, 그리고 말씀 사역에 항상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한다. 형식에 치우친 신앙 활동은 영혼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습관적 외식을 부추긴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가 처한 위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습관적이고 의례적인 신앙생활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떡과 잔을 대할 때, 과연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나아가, 요한복음 13장 18-19절에서 예수님이 "이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제자들이 유다가 배신한 뒤에야 비로소 "아, 주님이 이미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이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을 시사한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구원 계획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배신이라는 최악의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구속 섭리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제자들은 훗날 주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더더욱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점을 알게 된 제자들은, 순교의 길로 나아가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다 개인에게는 그 사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고, 자신의 배신을 되돌릴 시간과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래서 이 비극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필연의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유다의 책임을 조금도 경감시켜 주지는 않는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맞물리는가를 보여 주는 복합적인 사건이며, 교회 역사상 끊임없이 논의된 주제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그 신학적 논쟁보다는, 결국 죄의 책임은 인간이 자신이 짓는 것이라는 단순 명료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그 죄조차도 구원 계획 안에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점이, 죄를 정당화하거나 가볍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요한복음 13장과 시편 41편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심'과 인간의 '끝까지 거부함'의 대조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반면, 인간은 그 사랑을 저버리고 등을 돌릴 수 있다. 유다는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이 사실을 목회 현장에 적용할 때, 교회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죄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붙들고 돌이키도록 권면해야 하며, 둘째, 결국은 개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목회자는 양 무리들을 향해 인내하며 사랑을 전해야 하고, 공동체는 서로를 영적으로 깨어 살피고 권면해야 한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 책임은 당사자의 몫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결론을 맺는다. 우리는 모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말씀 앞에서,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중에도 우리가 그 은혜를 배신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혹시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분노나 실망, 탐욕이 자라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사탄은 그러한 틈을 노려 더욱 심각한 죄로 이끌어 간다. 반대로, 만약 이미 배신의 길을 걷고 있거나, 공동체와의 관계가 심각하게 깨진 사람을 발견했다면, 예수님이 유다에게 하셨던 것처럼 끝까지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 설령 그가 마음을 열지 않을지라도, 혹은 성도들의 권면을 거부할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의 길을 열어 두는 것이 주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스스로를 닫아 버린다면, 그것은 본인의 책임이며, 결국은 심판의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교회 내부의 갈등이나 배신을 다룰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제적 지침을 준다. 사람들은 자주 실망시키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예수님의 방법은 항상 '끝까지 사랑으로 품고 권면하는 것'이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런 자세를 견지할 때 비로소 진정한 회복과 치유가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실제 목회 현장에서도, 예상치 못한 배신과 갈등, 분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상처를 입는다. 그러한 때에, 교회가 다윗의 시편 41편과 예수님의 행적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사람을 쉽사리 정죄하고 몰아내는 극단적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가능하면 회개와 화해의 과정을 우선적으로 시도할 것이다. 물론 항상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의 기록이 보여 주듯, 유다처럼 끝까지 마음을 굳게 닫고 주님을 떠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전했다'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시편 41편과 요한복음 13장을 통해, 다윗과 예수님께 일어난 배신의 사건이 반복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 배신은 죄로 인해 병들고 약해진 영혼이 회개하지 못했을 때 나타난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영혼조차도 건져 낼 길을 마련하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유다를 향해 끝까지 손을 내밀어 사랑을 베푸셨으며, 제자들에게는 "내가 그인 줄 믿게 하려 한다"고 예언의 완성을 말씀하셨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구원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묵상하게 된다. 교회는 늘 이 tension(긴장) 속에서 사랑과 훈계를 함께 실천해야 하며, 자신도 배신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날마다의 예배와 성찬을 통해 "주님이 나를 위해 몸과 피를 주신 그 사랑을 지금도 기억하는가?"라는 질문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예수님의 통곡과도 같은 말씀이 우리 교회 안에서 재현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진정한 사랑과 섬김이 충만한 공동체로 세워져 갈 것이다.

이 모든 가르침을 종합할 때, 장재형목사는 "마지막까지 동행하라"는 표현으로 요약한다. 주님께서도 배신을 예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발을 씻기시고, 끝까지 기회를 주셨듯이, 교회 역시 연약한 자가 있으면 끝까지 돌보아야 하고, 동시에 서로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책임이 있다. 그렇게 하면서도, 개인의 최종 선택을 강제할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가 스스로 어둠으로 나가더라도, 교회는 주님이 보여 주신 진정한 사랑의 방식을 추구했는지, 자기 책임을 다했는지 다시금 돌아봐야 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신약 교회가 이상적인 공동체성을 실천하는 길이며,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안타까운 장면이 반복되지 않도록 막는 예방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