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7장 9-11절 말씀에는 사도 바울이 두 가지 근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낳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안에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근심이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뜻을 이루려 하는 근심이 있는가"를 강하게 묻고 있습니다. 본문을 좀 더 살펴보면, 9절에서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드러나는 바울의 마음은 그저 사람들을 '괴롭혀서' 근심에 빠지게 하거나, 어떤 불안함을 조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근심을 통해 영적 돌이킴, 참된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라는 대조가 이어집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마음이 쓰이고, 그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여 결국에는 구원까지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세상 근심'은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결국 죽음에 이를 뿐이라는 겁니다.
바울이 이같이 말한 이유는, 자신이 복음을 전한 교회들, 특히 고린도 교회가 온전한 믿음 안에서 성장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쓴 편지에서, 그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서 바울은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말 그대로 바울은 사도적 권위자이기 이전에, 영혼을 위해 전심으로 애쓰는 '목자의 심정'을 지닌 자였습니다. 그는 단지 헬라 철학자나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로서 교회를 이끄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더욱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도들의 영혼을 더욱 건강하게 세울 수 있을까" 하는 근심이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0절에서도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과 맞닥뜨린 상황도 그랬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얼마 후 거짓 교훈에 휘둘리며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다시금 그들을 돌이키려 애쓴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요 맥락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교회를 향해 뜨거운 사랑과 간절한 근심을 동시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에 있는 이 근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의 독자들은 바울이 가졌던 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어느 정도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통해 그들의 잘못을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고 꾸짖고, 심지어 때로는 그들의 신앙 상태를 흔드는 심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목적, 곧 이들이 회개함에 이르고, 그 회개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온전히 걷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9)"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을 헐뜯거나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직 영적인 생명에 이르도록 바른 길로 세워주려는 근심이 바울 안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바울뿐 아니라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거룩한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 근심은 눈으로 볼 때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근심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그 방향과 근본 동기가 전혀 다릅니다. 세상 근심은 내 일상, 내 삶의 문제, 재정적 걱정, 인간관계의 불화 등, 결국 '내가 손해를 보면 어쩌나'라는 나 중심의 불안과 근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주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내 삶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풍성한 은혜를, 내가 혹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이는 세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근심'으로서, 결국에는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온전한 회개와 회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이 있는 근심입니다.
이런 차원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서는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 가운데, 바벨론 왕의 시중을 들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의 파괴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어찌하여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라고 탄식하고 절망하던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단순히 조국의 멸망 소식을 듣고 민족적 우울감에 빠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민족의 재난이기에 애통해했지만, 그 근본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 선택하신 백성이 포로 되어 버려진 처지"에 대한 거룩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근심을 품고 하나님께 나아갔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금식하며 간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당대 제국의 왕이었던 아닥사스다의 마음을 움직여서, 아무 권세도 없고 아무 힘도 없어 보이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벽을 재건하는 역사적 사명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술잔을 바치는데, 그 얼굴에서 어찌할 수 없는 근심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왕의 시중을 드는 자가 이렇게 근심을 보였다는 것은 사실 큰 불경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고대 왕정 체제에서, 왕에게 시중드는 사람이 얼굴에 수심을 잔뜩 드러내면, 왕의 기분을 해치는 일로 여겨질 수 있었고, 심하면 벌을 받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왕이 그 근심을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단지 보았을 뿐 아니라, 그 근심을 묻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한 전개입니다.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강대국 제국의 왕이 하찮아 보이는 포로 출신 술 맡은 관원 하나의 마음 상태를 눈여겨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가능케 하신 것입니다. 그토록 거룩한 근심을 마음에 품은 느헤미야를 통로로 삼아, 왕의 마음까지 움직이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거룩한 근심 하나가 제국을 뒤흔드는 데 쓰임 받았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 근심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영적 유익도 남기지 못한 채 때로는 우리에게 절망만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품고 살면, 뜻밖의 자리에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그 문제가 오히려 주님의 손에 들려서 공동체를 살리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느헤미야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에스라를 보면, 그는 학자이자 제사장으로서 포로 귀환 세대와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 중건과 백성들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하였고, 하나님께 부름받아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을 깨우치도록"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당시 이스라엘 역사의 큰 두 축으로서 함께 사역했습니다. 그들이 역사에 크게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 개인의 안위나 명예를 우선시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백성을 향한 근심과 열정을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의 사역을 낱낱이 기록해 후대에 전해줍니다. 본래라면 '이름 없는 포로 중 한 명' 혹은 '학문이 뛰어난 레위 지파의 제사장 한 명' 정도로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왜 이렇게 무너져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로운 근심을 품었고, 그 근심이 결국에는 스스로를 부르심의 자리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에서도 이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보이신 일하심은 놀라운 장면의 연속입니다. 바울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심하게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눈이 멀게 되었고, 당시 교회 사람들은 바울의 박해 소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한편에서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준비하셔서 바울에게 안수하고 눈을 뜨게 하며, 그를 교회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어떻게 저 박해자를 우리가 받아줄 수 있나"라는 근심이 있었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아나니아가 가졌던 근심은 단순한 불신이나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의 순종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쓰길 원하신다면, 내 역할은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거룩한 근심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초대교회 최대의 전도자가 되었고, 이방인의 사도로 헌신하여 놀라운 사역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비슷한 예로,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도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으나 경건한 사람으로, 선행을 베풀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였습니다. 동시에 유대인인 베드로는 이방인과의 식사를 꺼리는, 여전히 구약적 전통이나 민족적 자부심에 매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를 부르심과 동시에, 베드로를 따로 준비시키십니다. 환상을 통해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먹으라" 하시며 베드로의 편견과 완고함을 깨뜨리십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 베드로는 "내가 진실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다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통해 이방인 선교의 새로운 문이 열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적 시선으로 보면 근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방인 집에 왜 가야 하나,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니 무슨 말인가." 이러한 마음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근심이 세상적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일을 행하시려 하시는가,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며, 내가 거기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차원이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우리는 매일 다양한 근심과 염려를 마주합니다. 재정적 문제, 가정 문제, 자녀 문제, 건강 문제 등등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수많은 고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후서 7장에서 말하듯, 중요한 것은 "이 근심이 과연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무엇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가"입니다. 나의 생존이나 안정, 혹은 단순한 불안 해소를 위한 근심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고, 나도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지만 아직 내게 부족함이 많아 이곳저곳에 막히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나오는 거룩한 근심인지 스스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고후 7:10)"라고 했습니다. 즉, 이 근심은 단지 불안함이나 우울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철저히 '돌이킴'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회개(메타노이아)란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며, 삶의 전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품고 사는 사람은 늘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가? 혹시 내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살고 있진 않은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 돌아봄이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더욱더 하나님 품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이 있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복된 길입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그 어떤 해결책도, 세상 근심은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거룩한 근심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다시금 데려가고, 거기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나는 과연 어떤 근심을 품고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보면 좋겠습니다. 만약 내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이 대부분 세상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나 교회와 이웃, 복음 확장과 선교를 위한 근심은 전혀 없는 상태라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바울처럼, 느헤미야처럼, 에스라처럼, 아니면 초대교회 제자들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품고, 그분의 근심을 내 근심으로 품을 줄 아는 변화가 일어나야 마땅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내 앞에 닥친 문제와 걱정을 외면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현실적 필요와 어려움을 주님 앞에 맡기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세를 가지면, 세상 근심이 우리를 함부로 무너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현대 교회의 상황을 돌아보면, 안타깝게도 자주 세상 근심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봅니다. 일부 성도들은 재정적 문제에만 골몰하거나, 세상적 성공에 대한 욕망을 신앙과 혼동하면서, 기도를 통해 그저 '내 문제'만 하나님께 해결해달라고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근심에 동참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이 이 시대에 원하시는 것, 교회와 이웃과 이 민족과 열방을 향한 당신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그 크신 뜻에 내가 순종하기 위하여 무엇을 내려놓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이 우리 기도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시기 적절하게 공급해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이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줄곧 "하나님의 근심을 우리의 근심으로 삼자"는 메시지를 강조해 왔습니다. 그분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복음 전파와 제자 양육 사역을 감당하면서, 단지 '교회를 몇 개 세우는' 외적 목표에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자녀들과 교회를 돌볼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존재 이유, 성도들의 영적 건강, 세계 선교와 복음화라는 더 큰 지향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세상의 여러 시선과 평가 앞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고민하며 걸어가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근심하는 자들은, 비록 고난과 난관을 맞닥뜨릴지라도, 끝내 그 길이 복음의 열매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의 사역' 역시, 여러 나라와 공동체 가운데서 말씀 사역과 제자 양육, 그리고 미디어와 교육 등을 통해 결실을 맺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길이 바울과 느헤미야가 걸었던 길, 곧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근심'을 품고 걸어가는 길의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선언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계속 울림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시대를 변화시키고 귀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이 거룩한 근심을 품었던 이들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랬고, 에스라가 그랬고, 바울과 초기 교회 성도들이 그랬고, 그 후대에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이를 실천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살았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루터나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부터, 존 웨슬리나 윌리엄 케리, 허드슨 테일러, 그리고 수많은 한국 교회의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그러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이 시대에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야 하는가, 교회가 어떻게 주님께 더욱 순결하게 헌신할 수 있는가, 잃어버린 영혼들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 근심은 단순한 감정적 걱정이 아니라, 기도로 이어지고, 헌신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역사와 문화마저 바꾸는 불길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길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근심을 우리 마음에 품지 않으면, 교회는 이 땅에서 본질을 잃고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교회 안의 분열, 세속화, 도덕적 타락 등을 돌아보면, 그 근본에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근심과 기도가 사라졌을 때"가 많습니다. 초기 교회가 가졌던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며, 각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는 모습'이 아니라,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 나의 생각과 맞는가"라는 기준으로 판단하고 근심하다 보면, 하나님 나라의 의는 뒷전이 되고, 결국 세상 근심에 사로잡힌 공동체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교회는 외형은 남을지 몰라도, 속은 죽은 나무처럼 됩니다. 바울이 말한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는 진리가, 교회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이 지금 이 시대를 향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은 영혼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내 직장과 학교, 가정에서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나?"라는 거룩한 근심을 품을 때, 그리고 그 근심을 가지고 기도로 나아갈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가 임하고,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돌파구가 열리며, 교회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 주목은 세상이 추구하는 화려함이나 스캔들이 아닌, "저 사람들은 세상과 다르게 서로 섬기고 사랑하고, 신기할 정도로 이웃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구나"라는 놀라움입니다. 초대교회가 로마 사회 가운데서 "저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라"라는 칭찬을 얻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근심이 그저 머릿속 걱정에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과 삶의 변화로 나타날 때, 세상은 교회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는 거창한 사역이나 규모가 큰 행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작은 이웃, 혹은 교회 내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한 명의 성도에게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어려움을 겪는 형제자매를 보면서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 거지?' 하는 비판적 태도나 무관심이 아닌, "하나님, 저 영혼을 어찌하오리까?"라는 근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또 교회가 지역사회에 어떤 봉사를 해야 할지, 선교지에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줄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재정이 부족하니 무리하지 말자'는 식으로 세상 근심만 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어떻게든 길을 여실 것이다. 우리가 먼저 헌신하고 기도하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근심과 열정이 있을 때, 놀라운 기적과 섭리가 펼쳐집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 적들의 방해와 지역의 혼란, 내부의 반대 등 수많은 현실적 장애물이 있었지만,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주의 도우심을 신뢰했습니다. 그 결과 단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와 함께 백성의 신앙이 살아나고, 대대적인 영적 회복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재현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그러한 근심을 품고 있는가, 그리고 그 근심을 품었을 때 실제로 순종하며 행동으로 옮길 각오가 되어 있는가입니다. 바울의 근심, 느헤미야의 근심, 에스라의 근심, 아나니아와 베드로가 품었던 근심은 모두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무엇인가가 있고, 거기에 내가 동참하길 원하지만 내 안에 두려움도 있고, 아직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도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끝내 그 거룩한 근심을 기도로 가져갔고, 사람들의 비난과 오해, 여러 현실적 장애를 이겨내며 전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성경은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모범 사례'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나도 이렇게 살 수 있구나. 나도 이런 근심을 품고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구나"라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진리는, 장재형목사의 사역 전반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는 여러 공동체와 사역지에서 제자훈련, 성경 공부, 미디어 사역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며,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이 시대에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어떤 길을 열어가야 하는가"를 고민해왔습니다. 또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우리 각자는 어떠한 내적 준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가르치고 실천해왔습니다. 물론 완벽한 사람이나 완벽한 사역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고, 여러 상황적 어려움이나 사람들의 불신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근심이 어디서 비롯되었느냐"입니다. 세상적인 야망이나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 시대에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시대에 수많은 영혼이 복음을 듣고, 교회가 회복되고, 성도가 자신의 소명을 깨닫는 일들이 일어나는 배후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거룩한 근심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세상을 향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7장에서 구분한 대로, 세상 근심만 하다 보면 우리도 결국 사망의 길로 치닫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품을 때, 우리는 후회 없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그 회개로부터 비롯되는 영적 성숙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숙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교회와 지역, 나아가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됩니다. 느헤미야가 그랬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으로 주신 '의로운 고통과 근심'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그 근심을 붙들고 기도로 나아가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를 향해 여러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부는 냉소적이고, 일부는 무관심하며, 일부는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향해 "뻔하다,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정말로 이 땅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려면, 그저 외형적인 프로그램이나 행사를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 상황,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근심,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이 왜 이렇게 많은가, 정말 예수님의 복음이 이 도시, 이 사회 구석구석에 전해져야 하는데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 이렇게 많구나"라는 근심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 안에서, "주님, 제가 무엇을 내려놓고, 어디로 가며, 누구와 함께 이 일을 해나가야 합니까?"라는 구체적인 응답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응답에 순종해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현실이 되는 놀라운 장면들을 만나게 됩니다.
역사는 이러한 거룩한 근심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써 내려가집니다. 느헤미야가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을 들어 쓰십니다. 한편으론 아무 대단한 배경이나 스펙이 없어도, 단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 저는 제가 있는 이 자리에서 당신의 마음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 도시와 이 땅, 이 세대가 주님을 알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라는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제국의 왕이 시중드는 종의 근심을 보게 하셨듯이, 오늘날의 여러 상황과 문을 열어 "가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과 교회사, 그리고 오늘의 간증들을 통해 배우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기쁨과 평강은 바로 이 자리,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품을 때 주어집니다. 이 근심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절망으로 끌어가거나, 무력감에 빠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말씀이 인도하는 길로 걸어갈 수 있게 해줍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 제게 오늘도 이 마음을 지켜주소서. 주님의 근심을 나도 품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 교우들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요청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늘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근심을 품고 있는가?" 물론 삶의 현실적 문제들을 완전히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가"를 근심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낳는 근심, 후회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러한 근심을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또한 이 시대의 교회로서,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강조해온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향한 근심"을 놓치지 않고 붙들어야 합니다. 비록 세상은 우리에게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고 냉소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대한 근심을 품었을 때, 하나님께서 제국의 왕을 움직이시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케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애통해하고 부르짖으며, 그분의 나라와 의를 위해 거룩한 걱정을 품는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새롭게 되새기며, 그것을 단지 이론이나 교리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삶의 매 순간에 적용하기를 소망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가 부딪히는 사람과 일들 가운데, 세상 근심으로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아,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놓치고 있구나"를 돌아보고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진정한 기도가 회복되고, 성령의 능력이 임하며, 사망이 아닌 생명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주님께서 친히 책임져 주시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우리 각자가 느헤미야와 같이, 바울과 같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거룩한 근심'을 품으며 걸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그 마음을 붙든 자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기 있게, 겸손히, 간절히 이 길을 걸어갑시다. 그러할 때, 우리 역시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처럼, 이후 세대에게 거룩한 유산을 남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를 매일 새롭게 하고, 결국 후회 없는 구원에 이르는 풍성한 열매가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