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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복음의 역동성

1. 성경의 장절 구분과 구약의 상하권, 그리고 이사야서의 구조

성경은 장과 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본래 하나의 완성된 글로 쓰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장과 절의 구분은 사람이 편의상 만든 것이지만, 그것이 우연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매우 탁월하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13세기 초인 1227년에 신약성경의 장 구분이 이루어졌고, 16세기 중반인 1551년에 절 구분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교회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성경을 읽는 것은 제한적이었고, 일반 평신도들은 성경에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루터와 개혁자들이 평신도들도 읽기 쉽도록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장과 절로 구분된 성경의 존재는 말 그대로 혁명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장과 절로 구분함으로써 누구든 원하는 구절을 찾아 읽고 묵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엄청난 이점을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의 흐름을 통해 현재 손쉽게 성경을 찾아볼 수 있고, 함께 연구하며 예배 가운데 특정 본문을 찾아갈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하와 역대상하의 경우도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한 권의 두루마리로 존재했으나, 이후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또 하나의 장절 구분처럼 상하로 나누어 읽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오랜 역사를 거치며 전해 내려온 것인데, 실제로 히브리어 성경의 편집적 전승 과정을 살펴보면 두루마리가 길고 양이 많아져 하나의 두루마리에 다 담기 어려운 문제도 있었습니다. 결국 물리적인 이유와 함께 독자의 학습 편의를 위한 목적으로 '상하'로 분권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개역개정판이나 다른 번역본에서도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분명히 별개의 책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고 내용적 맥락도 정확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대상과 역대하도 한 권의 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분권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정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사야서는 한 권으로 묶여 있어서, 전체를 통전적으로 읽는 것이 훨씬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실제 예수님과 사도들도 이사야서 전체를 한 권으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대체로 이사야서 전체를 하나의 책으로 받아들이며 묵상해 왔습니다. 물론 학문적으로 1이사야, 2이사야, 혹은 3이사야로 세분화하여 연구하는 전통이 있지만, 신앙적 차원에서는 한 권이 주는 메시지 속에서 '이사야 예언의 복음성'을 발견하며 우리의 믿음을 확고히 세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성경의 각 책을 원래의 맥락과 실제 역사적 전승 과정을 모두 고려해 읽으면,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신약시대에 접어들면, 특히 13세기와 16세기의 장절 도입은 기존에 사제나 특별한 연구자들만 접근할 수 있었던 성경을 일반 신자들이 더욱 쉽고 체계적으로 접하게 해준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루터나 츠빙글리,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표방하며, 라틴어 성경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고 보급하기 시작했을 때 이 장절 체계가 크게 기여한 것입니다. 예배 때에도 사제만이 성경을 낭독하고 교인이 들을 수만 있던 시대가 지났고, 찬송도 일반 평신도는 함께 부르지 못했던 구시대적 전통이 바뀌어, 오늘날에는 우리 모두가 시편 150편의 말씀처럼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명령을 직접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가대만이 거룩하게 찬송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다 함께 입을 열어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교회의 저변에서 신앙을 기초로 하는 수많은 성도가 직접 말씀을 묵상하고, 자유롭게 찬송 부르며, 성경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러한 성경의 장절 구분과 편의성에 힘입어, 많은 성도들이 말씀을 더욱 가까이 대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해 왔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성경 앱 등으로 더 빠르고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면서, 말씀 연구가 한층 더 확산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이들이 기도와 묵상을 통해 말씀의 본질을 붙들고, 공동체 안에서 자유롭게 토의하고 또 각자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역사가 활발해지는 것은 모두가 '장절 구분'이라는 작은 장치가 지닌 실용성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장절은 어디까지나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회 역사 속에서 성령의 섭리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상하와 역대상하는 각각 분권되어 우리가 보기에 별개의 책처럼 보이지만, 같은 스토리 라인을 공유합니다. 예컨대 사무엘상하에서는 사무엘 선지자와 사울, 그리고 다윗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왕정 시대의 시작과 그 통치의 변천사가 이어지는데, 이를 상권, 하권으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소제목처럼 기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사실 상하를 통으로 이어서 보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굉장히 극적인 전환점들을 한 번에 볼 수 있어, 맥이 훨씬 자연스럽게 연결되곤 합니다. 역대상하도 다윗 시대 이후 솔로몬과 분열 왕국 시대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묶어 놓았지만, 물리적 이유와 내용 분량 때문에 나뉘어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의 구조를 살펴보다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장 절, 상 하'라는 구분이 단순한 구획 이상의 은혜로운 통찰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사야서는 그 문체와 예언적 시점에 따라 1이사야와 2이사야를 구분하는 전통이 있지만, 교회 전승에서는 그를 한 권으로 통합하여 사용해 왔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사야서를 인용하실 때, 특정 장만 가리키지 않고 전체를 아우르는 맥락에서 인용하신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사야서가 구원사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명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본문의 역사적 배경, 메시지, 예언의 대상과 시점, 그리고 메시아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전체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물론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또는 포로기 말기로 두는 시각이 주류이지만, 교회 내 신앙적 이해에서는 그 모든 예언이 결국 하나의 구속사적 서사를 보여준다는 데 더욱 무게를 둡니다.

종교개혁 전후의 시대로 넘어가 보면,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95개 조항을 게시하며 시작한 '종교개혁'은 일반 평신도가 직접 성경을 읽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전에는 라틴어 성경(불가타)을 사제나 수도원 등 제한된 계층이 소유하고 해석할 수 있었고, 평신도들은 사실상 언어적·문화적 장벽 때문에 성경을 대면하기 어려웠습니다. 교회 전통에 따라 주어진 가르침과 성례에 참여하기만 했지, 스스로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보급하고, 동시에 장절 구분이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좀 더 짧은 시간에 말씀을 찾아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영어권 국가에서도 위클리프나 틴들 등이 영어 성경 번역에 헌신하며, 말씀을 직접 볼 수 있게 한 것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곧 교회 구조를 뒤흔드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권위가 오로지 '교회(사제·주교·교황 등)'에만 있다고 여겨지던 시대에서 벗어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주목받았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종교개혁 이후 더욱 확산된 '모든 성도가 말씀을 직접 읽고 묵상하는' 전통이 우리 시대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교회사의 관점에서 볼 때, 말씀이 가려지거나 특정 권위자에게만 독점되면 반드시 변질이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이 이룬 최대의 업적이 바로 '번역된 성경'을 평신도에게 보급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장절 구분 체계를 통해 구절 단위로 쉽게 인용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된 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면 몇 초 만에 원하는 성경 구절을 찾아볼 수 있고, 다양한 번역본을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설교 준비를 할 때나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이러한 장절 구분과 본문 검색 기능은 매우 요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편의가 단지 형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편의를 활용해 더 깊은 묵상, 더 충만한 영적 성장을 이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강조했고,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씀처럼 모두가 함께 찬송을 부르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실제로 중세시대만 해도 성가대가 회중을 대신해 찬송을 불렀고, 평신도는 듣기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나누고 직접 부르는 공동체 예배가 종교개혁 이후 점차 확산된 것은 '성도들의 성경 읽기'와 밀접히 연관됩니다. 찬송은 입술의 고백이지만, 그 근거가 되는 것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 곁에서 가까워지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해질 때, 자연스럽게 찬송과 예배의 자발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절 구분의 도입과 종교개혁, 그리고 평신도의 성경 접근이 오늘날 우리가 예배 중에 열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깨닫는 커다란 축복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10장 6~8절 말씀에서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주님을 모셔오겠느냐, 혹은 누가 저 깊은 무저갱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다시 불러올 것이냐"라고 묻는 방식으로, 이미 주님의 말씀이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선포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것을 문자화하여 기록해놓은 성경 역시 우리가 언제든 펼칠 수 있도록 지금은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이제는 교회 안팎을 막론하고 개인이든 공동체든 말씀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성경 한 권을 평신도가 전부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언어로까지 폭넓게 번역되어, 소통의 폭이 훨씬 커졌고, 이 모든 흐름 가운데 장절 체계가 보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역사를 되짚으면서, 성도들이 성경 자체를 더 존중하고 즐거워하며 가까이 대하기를 권면합니다. "장과 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장절이 우리에게 허락해주는 말씀의 접촉 기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상하, 역대상하, 그리고 이사야서 등 다양한 예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 결국 분권이나 장절 분할의 목적은 독자의 이해와 접근성을 높여 '말씀의 진리를 더 깊이 경험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오경을 암송하며, 선지서와 시편을 노래로 불렀던 것처럼, 신약 교회 시대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야 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 시대에는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찾아 특정 구절을 펴서 읽기 힘들었지만, 오늘 우리는 정말 손쉽게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성경을 경외함으로 읽고 묵상하며, 더 나아가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이자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데살로니가전서의 배경과 바울의 복음 전파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함께 기록한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따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심한 고난과 투옥, 매질을 당한 뒤에 데살로니가로 이동했을 때의 배경이 자세히 나옵니다. 당시 바울은 제2차 선교 여행 중이었고, 마게도냐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복음을 전한 뒤, 궁극적으로 로마를 거쳐 지중해 세계의 땅 끝으로 여겨지던 스페인까지 가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등 큰 박해를 당했음에도, 바울은 그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기를 선택했습니다. 바로 그다음으로 거처를 옮긴 도시가 마게도냐의 수도격이었던 데살로니가입니다. 인구가 20만 명에 이르는 큰 항구 도시로서 상업이 발달했고, 그곳에 다수의 유대인이 정착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간 성경을 강론하며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했습니다.

당시 유대교를 신봉하던 헬라인들, 즉 경건한 이방인 신자들 중에는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한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구약성경(당시에는 신약이 아직 정경화되지 않았으므로 구약 성경이 유일한 경전이었습니다)을 풀어 해석하며,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장면에 성령의 감동을 크게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절에서 말하듯,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는 선포는 매우 직설적이고 핵심적인 복음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은 핍박으로 인해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지친 상태였음에도, 불굴의 의지와 성령의 능력으로 끊임없이 복음을 외쳤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영적 교훈을 줍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부드러운 말만 골라 하기보다, 진리 자체를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사랑과 인격적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복음의 진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분명히 증거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나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도시를 선동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한다"고 거짓증거를 퍼뜨렸고,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을 습격해 가정교회를 흔들었습니다. 이후 박해가 심해지자,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떠나 근처 베뢰아로 옮겨 갑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찾아온 유대인들의 방해로 인해, 바울은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아덴으로 피신하고, 그 뒤 고린도로 이동합니다. 이런 박해의 와중에서도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남아 성도들을 돌보고, 때로는 바울을 만나 보고를 하는 등 '전진하는 선교 사역'과 '남아 있는 목양 사역'을 병행했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 실라, 디모데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전히 환난 중에 있고,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바울과 실라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비난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직접 펜을 들어 쓰게 된 서신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는 그 교회가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의 모범을 보인 사실을 칭찬합니다. "너희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핍박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믿음이 더 굳건해지는 은혜로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2장과 3장에서는 바울이 자신과 동역자들의 진심을 변호하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에게 휩쓸리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빌립보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감옥에 갇혔고, 데살로니가에서도 소동을 일으킨 뒤로 핍박이 시작되자 무책임하게 도망친 것 아니냐'는 식으로 비난했습니다. 또한, '그가 과연 사도로서 정당한 권위가 있는지',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이 진짜인지' 등 다양한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과연 어떤 태도로 데살로니가에 임했으며, 환난 중에도 어떻게 복음을 전하였고, 또 얼마나 그들을 사모하며 기도했는지를 매우 정감 어린 어조로 설명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바울의 리더십과 목회적 태도를 강조합니다. "사역자는 때로는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지만, 떠난 뒤에도 끝까지 영혼을 품고 기도하며 돌보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바울이 "나는 결코 너희를 잊은 적이 없다. 육체적 거리는 멀어졌으나, 영적 연대는 더욱 강해졌다"고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난 뒤에도 늘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디모데를 다시 보내 그들의 상황을 확인하고 격려했습니다. 바울이 마음을 다해 돌보았던 그 모임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면서, 더 풍성한 사랑과 소망을 꽃피우는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역자나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지향점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에 연연하기 시작하면, 복음의 본질이 희미해지고, 아첨이나 기만, 혹은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탐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늘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살았기에, 어떠한 오해나 비난에도 굴하지 않았고, 끝까지 성도들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지키며 헌신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다시금 성도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었고, 결과적으로 교회가 분열을 뛰어넘어 한마음으로 서게 되는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과 11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을 '유모'와 '아버지'에 각각 비유합니다. 유모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듯, 부드러운 사랑으로 교인을 돌보는 이미지를 줍니다. 동시에 아버지는 자녀에게 책임과 훈계, 교정, 격려를 아끼지 않는 존재로, 엄중함과 인도함을 모두 상징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는 이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가리켜 '팀 영성과 전도의 영성'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바울, 실라, 디모데가 함께 팀을 이뤄 한 영성으로 동역했고, 동시에 각자 맡은 위치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보살폈습니다. 팀으로 일하되, 서로를 향한 책임감과 사랑, 그리고 교회에 대한 깊은 헌신이 동반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이 잠시 떠났을 때도 디모데가 교회를 세웠고, 디모데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다시 바울을 만나 대책을 나누고, 고린도나 다른 지역에서도 기도하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교회사가 증언하듯, 복음은 언제나 박해와 함께 전진해 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온 세계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지만, '큰 박해'가 일어나자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핍박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핍박을 통해 더 큰 확장의 계기가 된 교회입니다. 바울은 1장 6절에서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칭찬합니다. 이러한 환난 속의 기쁨은 오직 성령이 주시는 위로와 확신으로만 가능한 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한 번 그들에게 "너희가 받은 고난은 주님과 선지자들이 당했던 고난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오히려 기뻐하라"고 격려합니다.

물론 거짓 교사들은 계속해서 여러 의혹을 퍼뜨립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옥에 갇힌 것은 무언가 죄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 '데살로니가에서 소동만 일으켜놓고 도망갔다' 등등. 바울은 2장 2절에서 "우리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고 설명합니다. 즉, 바울과 동역자들이 겪은 투옥이나 매질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고행이나 쇼가 아니라, 실제로 복음을 위해 당하는 환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권면은 간사나 궤계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못을 박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정직하고 순수한 동기로 복음을 전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교회가 거짓말과 의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사도행전 28장에 이르면, 바울은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며, 유대인의 반응에 대해 "이 백성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고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이는 그들이 복음을 배척함으로써 '노하심이 끝까지 임했다'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살전 2:16). 노하심, 즉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복음이 그들에게서 떠나 이방인에게로 옮겨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졌다. 그렇지만 결국 이스라엘도 회복될 소망이 있다"는 식으로 신학적 해설을 덧붙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 간의 갈등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복음이 확장되는 다소 역설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핍박이 복음을 파괴하지 못하고, 오히려 확장시키는 힘이 되었다는 교훈을 주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영적 원리입니다. 미움을 심으면 미움만 돌아올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박해 속에서도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며, 교회를 견고히 세워가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마지막 구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강림하실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예수님 앞에 함께 서 있는 광경을 떠올리며 큰 위로와 기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전도자의 궁극적 보상이, 바로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주님 앞에 함께 서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교회가 박해와 분열의 위험을 넘어 굳건하게 설 때, 그것만큼 사도나 목회자에게 큰 보람과 감사가 없을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구절을 통해, "우리가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목적은 그곳에서 형제·자매들이 주님과 동행하며 성장하여, 결국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 함께 영광을 누리는 데 있다"는 점을 늘 강조해 왔습니다. 교회 사역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거나 자신의 명성을 세우려 하면 문제가 생기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도들을 온전한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열정에 집중하면 비방도 이겨내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진심 어린 호소와 변호, 그리고 교회를 떠났어도 '얼굴만 떠났지 마음은 떠나지 않았다'는 심정을 통해 참된 복음 사역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한 건물 안에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말씀으로 세워주며, 환난 중에도 끈끈한 영적 연대감을 유지하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데살로니가 교회에 분명히 전해준 메시지는, "사단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한마음으로 서면 절대로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호도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바울의 순수한 사도적 헌신을 기억하며 굳건해지기를 바울이 바랐고, 교회는 실제로 그 바람을 성취해 냈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초창기 역사를 보면, 박해 속에서도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잠시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디모데가 남아 양육을 도왔고, 또 다른 지역을 돌아온 뒤에도 그 교회를 계속 방문하고 싶어 했습니다. 실제로 3장에 따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사랑을 다시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그들의 믿음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기도해 준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가진 강력한 무기입니다. 서로에게서 떠나 있어도 기도로 연결되고, 목자가 떠나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여 교회를 보호하시는 놀라운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1세기 당시 로마제국 하에서 이방 지역 교회가 얼마나 탄압에 시달렸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꽃을 피워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또한, 사역자로서 바울과 동역자들이 보여준 열정과 진심은 오늘날 교회를 섬기는 이들에게도 본이 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아첨이나 탐심의 가면을 쓰지 않는 정직한 태도, 교회를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 애틋하게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박해와 분열 시도에 흔들리지 않고 기도로 연대하는 공동체 의식 등, 모든 면에서 현대 교회가 본받아야 할 미덕이 가득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바울의 전도와 목양,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준 믿음의 위대함을 강해(講解)하면서, 오늘날 어떤 첨예한 갈등이나 세속적 유혹이 교회를 덮쳐도, 결국 복음으로 하나 되고 말씀으로 굳게 서는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때론 교회 안에 거짓된 말이나 분열의 시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에는 성령의 보호하심이 임하며, 그 시도를 역이용해 교회가 더 단단해지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8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거워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교인들을 돌보는 목회자와 사역자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이 한 문장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려는 자세가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공부하며 사도 바울이 보여준 전도자의 길, 목회자의 길은 한마디로 '하나님께는 영광을, 교회에는 사랑을'이라는 관점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복음의 본질이 희석되고, 분열이 일어나며, 결국 누구도 영적으로 이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단 하나의 기준을 붙들고 나아갈 때, 때로는 박해와 오해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교회를 온전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들이 증언하듯, 그는 진정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였고, 그 제자도의 길 위에서 수많은 결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 결실의 열매였으며, 바울이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부를 만큼 사랑하는 공동체로 남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현장에서도,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여러 목회자가 바울의 영성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고한 기준,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도 복음을 직설적으로 전하되, 동시에 유모와 아버지처럼 온유하고 책임감 있게 돌보는 이중적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수적인 성장을 꿈꾸지만, 복음과 말씀의 본질이 희미해지면 쉽게 무너지거나 분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분명히 붙들고, 그 구원의 은혜를 서로 나누며 세워줄 때, 참된 부흥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한 번 고난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오히려 환난과 박해가 '믿음의 연단'이 되어 교회를 더욱 견고케 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이처럼 성경의 장과 절 구분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고, 구약성경 여러 권의 구조와 이사야서의 원래 모습, 그리고 신약의 장절 형성 과정을 되짚어 보면,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를 비롯한 모든 성경을 좀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 저변에 깔린 교회사의 발자취, 성령의 인도, 종교개혁자들의 헌신, 그리고 초대 교회 공동체의 영적 승리 같은 다채로운 배경을 함께 떠올리면,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 담긴 바울의 심정적 고백과 변호, "너희가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라는 사도적 사랑을 곱씹을 때마다, 그 사랑의 본질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그 사랑을 흘려보냈듯, 오늘 우리도 이웃과 성도들에게 동일한 사랑과 열정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교회를 흔드는 세력'을 경계하면서도, 그런 세력에 맞서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통해 거짓을 자연스럽게 무력화해야 합니다. 바울의 방식대로, 간사나 부정에서 난 권면이 아니라, 진리 위에서 오히려 더 온유하고 더 희생적인 사랑으로 공동체를 섬길 때, 결국 진실이 드러나고 교회가 하나 되는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장절로 나눈 취지를 이해하고,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 바울과 초대교회의 영성을 배우며, 현대 교회의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성도의 소명입니다. 그 여정 속에서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모두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유혹으로부터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장절의 편의성과 교회 공동체의 예배와 찬송 문화가 더욱 풍성해져, 오늘날도 계속해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꾸준히 강조해 온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와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