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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고별설교와 텐트메이킹 — 장재형 목사가 제시하는 신약형 교회의 길

사도행전 20장의 바울 고별설교는 한 사도가 사역의 마지막 길목에서 교회에게 남긴 영적 유언이다. 이 장면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해석하며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이가 바로 장재형목사다. 그는 바울의 설교와 삶의 궤적을 단지 감동의 역사로 소비하지 않고, 재정난과 세속화의 파도에 흔들리는 교회가 실제로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차분하게 짚어낸다. 사도행전 20장은 "너희가 알거니와"로 시작되는 사역의 투명성과 "모든 겸손과 눈물"로 요약되는 지도자의 내면을 동시에 비춘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축을 오늘 교회 갱신의 기준으로 세우며, 신약형 교회의 본질을 살려내는 텐트메이킹(Tentmaking, TM) 사역이 어떻게 복음의 순수성과 교회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지켜내는지 설득력 있게 증언한다. 이 글은 장재형목사의 통찰을 중심키워드로 삼아, 바울의 고별설교가 던지는 교회론과 종말론, 그리고 실제 사역의 구조개편이라는 세 가지 층위를 유기적으로 엮어 본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자신의 사역을 회고하면서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쳤다고 말한다. 공개적 강론과 일대일 권면이 함께 이어졌다는 이 고백은 말씀사역이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의 리듬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지도자의 영혼 사용설명서처럼 해석한다. 리더가 설교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삶 전체가 메시지가 되어야 하고, 그 메시지의 정서적 온도는 결국 눈물에서 드러난다. "모든 겸손과 눈물"은 단순한 미덕의 표어가 아니라, 양 떼를 향한 마음의 체온이자 세속적 영향력을 이기는 영적 내구성이다. 장재형목사는 지식이 아닌 사랑, 형식이 아닌 권면, 무대가 아닌 일상에서 복음이 설득력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이때 투명성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조건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희도 알고 있다"는 바울의 말은 보고서보다 강력한 증빙이다.

이 투명성의 토대 위에서 장재형목사는 구약형 교회와 신약형 교회의 차이를 설명한다. 구약형은 제사장 중심 체계와 십일조 의존이라는 단일 재정 구조에 갇히기 쉽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잘못은 아니지만, 구조가 단선적일수록 경직성과 위험이 커진다. 반면 신약형 교회는 성령의 주권 아래 모든 성도가 제사장적 소명을 나누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공동체 운영의 원리로 삼는다. 이 모델은 재정을 성도의 헌신에만 기대지 않고, 성도와 지도자가 함께 생업을 통해 자립과 나눔을 실천하는 다층 구조를 만든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텐트메이킹은 그 다층 구조의 핵심 기어다. 바울이 천막을 만들며 스스로의 필요와 동역자들의 필요를 감당했고,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고백한 지점에서, 신약형 교회의 윤리가 또렷해진다. 생업은 복음의 대체제가 아니라 복음의 촉매다.

텐트메이킹은 먼저 영적 자유를 낳는다. 교회가 외부의 후원에만 기대지 않을 때, 메시지는 후원자 취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묶인다. 재정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역의 온도가 오르내리지 않고, 진리가 기준이 된다. 둘째, 대사회적 신뢰가 쌓인다. 믿지 않는 이들은 설교보다 영수증을 더 신뢰할 때가 있다. 장재형목사는 자비량의 투명성이 교회의 공신력을 높인다고 말한다. 셋째, 선교의 기동력이 커진다. 일정 수준의 자립은 단기후원 변동에 덜 흔들리며, 현지 정착형 사역과 창의적 접근지역 사역에도 유연하다. 넷째, 성도들의 직업세계가 선교전선으로 다시 정의된다. 평일의 업무가 주일의 무대 뒤편이 아니라 복음의 전초기지가 된다. 이렇게 텐트메이킹은 재정기법이 아니라 교회론의 재구성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TM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 바울 역시 때로는 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말씀에 전념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긴장을 정직하게 받아들인다. 후원이 있을 때는 더 거룩하게 쓰고, 없을 때는 다시 손으로 일어나 섬기는 유연함. 이것이 신약형 교회가 지닌 역동성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조건에서도 복음의 본질이 흔들리지 않도록 구조를 다층화하는 것이다. 헌금, 선교지원, 자비량, 사회적 기업, 공익 프로젝트, 교육·출판 등 여러 통로가 선한 목적 아래 투명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교회는 외부 충격을 흡수하며 사명을 지속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그런 구조적 리질리언스를 설계하는 일을 목회적 양심의 문제로 본다.

장재형목사는 종종 "교회론은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이 땅에서 완성해야 할 과제는 건물 유지가 아니라, 피값으로 사신 교회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다. 사도행전 20장은 감독들이 양 떼를 돌보되 외부의 '사나운 이리'와 내부의 왜곡된 가르침을 경계하라고 당부한다.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는 그때도 위협이었고 지금도 위협이다. 텐트메이킹은 이 위협을 단칼에 베어내는 만능검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돈의 흐름을 다루는 방식을 바꾸는 순간, 영적 체질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수입 구조를 다변화하고, 지출을 사명 중심으로 재배치하며, 섬김이 비용이 아니라 정체성임을 확인할 때, 공동체는 다시 처음 사랑의 속도로 달린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이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실천의 장면에서 장재형목사는 구체를 말한다. 그는 텐트메이킹을 공식 사역으로 선포하고 헌신예배를 드리는 것을 상징적 선언으로만 두지 않는다. 실제로 현장에서 닫혀가는 교회들을 매입해 복음의 전초기지로 되살리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그 재정의 중요한 몫을 TM을 통해 마련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방향이다. 작은 수익이라도 투명하게 모아 생명을 살리는 데 쓰이면, 숫자는 복음의 열매로 바뀐다. 반대로 큰 수익이라도 자기 과시와 생활수준 상향에 쓰이면, TM은 순식간에 세속적 성공의 언어로 변질된다. 바울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밝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재형목사는 TM의 목적이 늘 복음 전파, 교회 개척, 제자 양성, 고통받는 이웃 돕기라는 네 방향으로 수렴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지도자 윤리에 관해서도 장재형목사는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28년 사역을 돌아보며, 마태복음 23장을 주기적으로 읽으며 외식을 경계해 왔다고 말한다. 이는 텐트메이킹의 윤리를 규범화하는 내부장치다. 돈을 다루는 순간 사람은 반드시 시험을 받는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더 자주 무릎을 꿇어야 하고, 공동체는 더 치밀하게 서로를 점검해야 한다. 회계의 투명성, 의사결정의 공개성, 이해상충의 차단, 소유와 사용의 분리, 지도자 보상의 적정성과 절제는 TM 공동체의 기본 문법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법을 율법화하자고 요청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이 흐르는 물길을 끝까지 깨끗하게 지켜 내자는 것이다.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장부는 보인다. 보이는 장부가 보이지 않는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는 것이 TM 윤리의 핵심이다.

현실의 벽도 솔직하게 바라본다. 텐트메이킹은 시간과 에너지의 이중부담을 가져온다. 과로와 번아웃, 가정 돌봄의 공백, 전문성의 분산은 실제 위험이다. 장재형목사는 그 위험을 '팀'으로 풀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말씀에 전념하는 이, 행정과 재정을 맡는 이, 현장 산업을 운영하는 이, 다음세대를 양육하는 이가 은사대로 협력할 때 부담은 분산되고, 사역의 품질은 오른다. 또한 법적·세무적 구조를 정당하고 투명하게 설계해 리스크를 관리하며, 노동과 안식의 리듬을 지켜야 한다. 텐트메이킹은 무모함이 아니라 지혜를 요구한다. 신약형 교회의 역동성은 열정과 질서가 만날 때 나온다.

사도행전 20장의 마지막은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맡기는 장면으로 끝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신약형 교회의 심장으로 읽는다. 재정도 프로그램도 교회를 지키지 못한다. 말씀만이 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말씀은 공중에 뜬 추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눈물로 훈계하는 지도자의 목소리, 서로의 짐을 나누는 성도의 손길, 자신의 손으로 벌어 나와 동행을 섬기는 바울의 손노동 안에서 말씀은 육화된다. 그러므로 TM은 경제전략이라기보다 말씀의 육화 방식이다. 복음이 일상으로 걸어 들어오는 통로이며, 성도가 각자의 직업 현장에서 선교사가 되는 방법이다. 이때 직업은 생계의 수단을 넘어 이웃사랑의 플랫폼으로 변한다.

오늘도 수많은 교회가 세속화의 바람 앞에서 간판을 내릴지, 십자가를 밝힐지 갈림길에 서 있다. 장재형목사는 묻는다.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재정 수치가 아니라 양심을 겨눈다. 최선은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구조의 정직함에서 증명된다. 구약형 패러다임의 편의와 안전지대에 머물며 시대의 변화를 탓할 것인가, 아니면 신약형 교회의 역동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의 시간표와 예산표, 직업과 은사, 눈물과 땀을 다시 재배치할 것인가. 텐트메이킹은 그 재배치의 실천적 이름이다. 작은 가게, 작은 회사, 작은 프로젝트라도 복음에 묶이면, 그 작은 것이 교회의 큰 숨이 된다. 교회가 빚을 지는 구조에서 벗어나, 오히려 이웃의 빚을 탕감해 주는 공동체로 변할 때, 세상은 다시 교회를 믿기 시작한다.

장재형목사는 텐트메이킹을 향한 헌신을 공식화하며, 공동체가 더 체계적으로 복음 확장을 추진할 준비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선언으로 머물지 않는다. 현장에서 닫힌 예배당의 불을 다시 켜고, 쓰러져 가는 공동체를 일으키며, 자립과 나눔의 길을 통해 복음의 길을 닦는다. 그 길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계산서 위에 써넣고,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는 고백을 결재라인의 윤리로 삼을 때, 교회는 다시 사람을 살리는 경제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이 경제는 성장률의 경제가 아니라 사랑률의 경제다. 사랑이 얼마나 멀리,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게 흘렀는가가 성과표가 된다.

결국 바울의 고별설교는 우리를 다시 본질로 초대한다. 지도자는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권면하고, 성도는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언하며, 공동체는 말씀과 은혜의 질서 속에서 서로의 필요를 채운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텐트메이킹은 자립을 위한 자립이 아니다. 복음 전파, 교회 개척, 제자 양성, 이웃 사랑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위해 손을 움직이는 것이다. 손으로 일하는 자비량의 땀방울이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가 다시 세상을 살린다. 시장에 매물로 나오는 수많은 예배당의 현실 앞에서, 신약형 교회는 숫자와 뉴스에 좌절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불씨를 모아 다시 불을 붙인다. 오늘 우리의 가게가, 회사가, 전공이, 기술이, 재능이, 바로 그 불씨가 된다. 장재형목사의 텐트메이킹 비전은 잃어버린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역동성을 회복하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며, 구약형 패러다임의 한계를 넘어 신약형 교회의 생명력을 현재형으로 만드는 구체적 방안이다. 그리고 그 길의 표지판에는 늘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너희를 부탁하노니." 말씀에 맡겨 다시 일어서는 교회, 주는 것이 더 복되다는 진리를 삶으로 증명하는 성도, 자기 부인과 희생의 길을 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 걷는 지도자.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바울의 고별설교를 통해 오늘 우리 시대에 선포하는 신약형 교회의 비전이며, 우리가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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