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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가 풀어낸 고린도후서 1–2장: 갈등을 넘어 화해로 향하는 ‘그리스도의 향기

고린도후서 1장 12절부터 2장까지는 초대교회가 겪은 가장 날것의 현실과 그 현실을 관통하는 복음의 결을 동시에 드러낸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본문을 "교회는 거룩한 이상향이 아니라 은혜로 모인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 읽도록 이끈다. 갈등과 오해가 잦다는 것이 교회의 결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작동해야 할 현장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가 일관되게 강조해 온 핵심,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는 로마서 5장 10절의 고백처럼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화목케 하신 사건에 닿아 있다. 이 화해의 진리를 심장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교회 생활은 곧바로 감정의 충돌과 관계의 소모전에 휘말리고 만다. 반대로 이 토대 위에서 본문을 읽으면, 상처의 자리에서조차 은혜가 움직이는 길이 선명해진다.

바울이 1장 앞부분에서 고백한 환난과 위로의 경험은 이 대목의 든든한 배경이 된다. 그는 도를 넘는 고난을 통해 자기 힘을 비우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모든 환난 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았다. 장재형목사는 흔히 떠올리는 "불굴의 바울상" 뒤에 이러한 영적 훈련이 있었다고 풀이한다. 타고난 강철 같은 기질이 아니라, 반복된 환난 속에서 단단해진 신뢰가 사도의 언어와 판단을 정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을 놓치면 이어지는 변증이 단지 자기변호로 들리지만, 사실 그 밑바닥에는 하나님 앞에 투명하려는 태도가 깔려 있다.

그래서 1장 12절에서 바울은 양심을 불러 증인 삼아 말한다. 그는 성도들을 대할 때 "육체의 지혜", 곧 계산과 처세로 접근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 다시 말해 은혜를 기준으로 걸었다고 밝힌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고백이 오늘의 리더십에도 그대로 유효하다고 말한다. 교회가 세상의 도구와 전략을 무조건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첫 동기와 최종 기준이 언제나 하나님 앞의 양심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결과의 효율보다 동기의 순전함을 먼저 묻는 태도, 그것이 신뢰를 낳는다. 논쟁이 격해질수록 우리는 결과 비교와 이익 계산으로 기울기 쉽지만, 바울은 동기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데서 대화를 시작한다.

당시 바울을 향한 핵심 의혹은 방문 계획 변경이었다. 고린도 안에서는 이를 빌미로 그를 변덕스럽고 모순적인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말이 떠돌았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예와 아니오가 함께 있는 불확실한 분"이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로 성취되었고, 교회는 그 완성에 "아멘"으로 응답할 뿐이다(고후 1:20). 장재형목사는 이 선언을 신앙의 핵심 구조로 읽는다. 우리의 "아멘"은 억지 결단의 감탄사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된 하나님의 "예"에 대한 신뢰의 호응이라는 것이다. 이 확신이 흔들릴 때 우리의 계획과 관계는 쉽게 오해와 의심의 회오리에 빨려 들어간다. 반대로 그 "예"를 붙들 때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이 우리를 흔들림 없는 반석 위에 세운다.

그러면 바울은 왜 고린도 방문을 미루었는가. 그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며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밝힌다. 그 시점의 공동체가 즉각적인 대면 교정으로는 더 큰 상처를 입을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결정을 목회적 용기의 전형으로 본다.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만큼,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은 어렵다. 바울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권위를 휘두르는 자리에서 사랑으로 섬기는 자리로 이동하는 이 전환이 공동체를 살린다. 때로 가장 용감한 선택은 즉각적 조치가 아니라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방치가 아니라 회개의 시간을 마련하고, 말씀과 성령이 일하실 공간을 여는 적극적 섬김이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눈물의 편지"를 먼저 보낸다.

2장에 이르면 이른바 "근심하게 한 자"에 대한 처리가 핵심으로 떠오른다. 바울은 그를 이름으로 낙인찍지 않고, 개인 감정에 매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 전체에 입힌 근심을 언급하며, 이미 합당한 징계가 시행되었다면 이제는 용서하고 위로하여 과도한 슬픔에 잠기지 않게 하라고 권면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교회 징계의 목적이 제거가 아니라 회복임을 뚜렷이 본다. 회개가 보이면 사랑을 "보여 주는" 공적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용서는 말의 영역을 넘어 공동체가 실제로 감당해야 하는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징계는 쉽게 의로움의 과시로 흐르고, 사람은 과거의 잘못에 영원히 묶인다. 복음은 그 고리를 끊는다. 죄를 인정하되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되 사랑으로 싸맨다.

바울은 이 과정 전체를 영적 전쟁의 한복판으로 규정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사탄에게 틈을 주고, 관계의 영구 파기를 부추긴다. 우리는 그 궤계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고후 2:11). 장재형목사는 사탄의 전략을 "상처의 무기화"라고 요약한다. 서로의 과거를 증거물로 삼아 돌아올 길을 막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붙들어야 할 균형은 명확하다. 진리의 경계를 흐리지 않되, 사랑의 회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강경함을 곧 의로움으로 착각하지 말고, 반대로 책임을 흐리는 느슨함을 은혜로 오해하지 말라. 바울이 보여 준 길-진리의 명확함과 사랑의 인내-을 함께 붙드는 훈련이 필요하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음에도 디도를 만나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아 그곳을 떠났다고 털어놓는다. 선교적 기회와 목회적 염려가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장면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바울의 사역 철학을 본다. 숫자와 사건의 지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람과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문이 열렸는가, 영향력이 커졌는가 같은 지표에 쉽게 매혹된다. 그러나 복음의 문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상처 입은 공동체를 먼저 마음에 두는 것, 그 균형이 바울의 길이요 교회의 생명선이다.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향기" 비유는 본문 전체를 하나로 묶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 지식을 아는 냄새를 각처에 드러내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 표현이 승리의 행진에 피워 올리던 향품의 이미지에서 왔다고 설명하며, 복음 증인은 말뿐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냄새가 나는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그 냄새는 누군가에게는 생명, 누군가에게는 거부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응의 차이를 결과로 착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하는 순전함을 지켜야 한다. 바울이 경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장사"하는 태도다. 말씀을 상품화하면 향기는 쉽게 변질된다. 설득의 기술을 연마하되, 설득의 근거는 언제나 하나님 앞의 정직과 투명함이어야 한다.

이 통찰은 오늘의 디지털 환경에서도 유효하다. 정보가 캡처되어 맥락 없이 퍼지고, 한 장면이 한 사람의 전부를 대변하는 듯 소비된다. 이런 시대일수록 장재형목사가 강조한 화해의 신학과 바울의 인내는 절실하다.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보다 서로의 동기를 확인하고, 공개적 비난 전에 비공개 대화를 시도하라. 회개가 보이면 사랑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어" 마무리하라. 징계가 필요하면 주저하지 않되 목적을 회복에 두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다리를 남겨 두어라. 그렇게 교회는 세상의 재판정이 아니라 복음의 병원으로 기능한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어떤 냄새를 풍기는가. 논쟁과 승부의 냄새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상처 입은 자를 위로하고 실족한 자를 일으키는 향기인가.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이 질문을 오늘의 교회에 던진다. 답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오해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먼저 사과하는 용기, 이미 충분히 아파한 사람에게 더 이상 과거를 들추지 않는 절제, 공동체의 기쁨을 돕기 위해 리더가 선택하는 느린 결정, 하나님 앞의 양심을 우선하는 투명성,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미 "예"가 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신뢰. 이 작고 일관된 선택들이 쌓일 때 교회는 냄새가 달라진다. 누군가는 그 향기를 거부하겠지만, 누군가는 그 향기에서 생명을 맡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기술이 아니라 마음, 지배가 아니라 섬김, 응징이 아니라 회복-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고린도후서 1-2장을 통해 다시 들려주는 오늘의 복음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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