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목사가 강해한 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얽힌 역사를 풀어내는 바울의 신학적 정점 위에서, 신앙이 무엇으로 서고 무엇으로 무너지는지에 관한 경고와 위로를 동시에 들려준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라는 도발적 물음으로 논증을 시작하지만 곧바로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못 박는다. 이 단호함은 은혜로 택하신 남은 자의 현실성에 기대고 있다. 엘리야 시대에 "나만 남았다"는 절망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실재 앞에서 수정되었듯, 집단적 탈선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답하는 공동체를 끊임없이 보존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구원은 혈통·제도·관습의 공적이 아니라 오직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라는 복음의 첫 원리로 재확인하며, 그 믿음이 공동체의 규모나 관습의 두께가 아니라 복음의 생명에 의해 판별된다고 설명한다. 남은 자의 신학은 소수 생존담이 아니라 은혜의 주권을 증언하는 렌즈다. 이 렌즈로 보면 실족의 표면 아래에서도 언약은 깨지지 않고 흐른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언약의 폐기라면 남은 자는 있을 수 없지만, 남은 자가 실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인내와 약속의 유효함을 반증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실족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역설적 확장을 낳았다고 해석한다.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는 판단은 역사 신학의 급진적 통찰이다. 축복의 자리를 상실한 듯 보이는 이들의 공백이 오히려 타자에게 열림의 문이 되었고, 이 열림이 다시금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만들어 회복을 촉구한다. 비극이 비극으로 직행하지 않고, 우회로를 통해 구원사의 가속 장치가 되는 장면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룩한 역전의 경제학"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실패와 편협도 하나님 손에 들리면 공동체와 열방을 살리는 변수로 전환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은 실패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실패를 절망의 종착역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그 중층적 시선이 바울에게서 배운 해석학의 미덕이다.
이방인에게 향한 경고는 또렷하다. 감람나무의 비유에서 이방인은 돌감람나무 가지가 되어 참감람나무의 좋은 뿌리에 접붙임을 받았다. 농사 상식으로는 좋은 가지를 열등한 뿌리에 접붙이지만, 복음의 역학은 반대로 작동한다. 열등한 가지가 탁월한 뿌리에 접되었고, 그 탁월함은 가지의 자랑이 아니라 뿌리의 은총임을 웅변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겸손을 요청한다. 은혜를 은혜로 기억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뿌리가 나를 붙들었다"는 사실을 잊고 "내가 뿌리를 보전한다"는 오만의 논리로 기운다. 교만은 신학적 오류를 넘어 윤리적 방종으로 번지고, 방종은 언약 공동체의 근육을 이완시킨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고 한 까닭은 바로 여기 있다. 인자하심만을 붙들면 값싼 은혜로 귀결되고, 준엄하심만을 붙들면 공포의 종교로 기형화된다. 두 속성의 균형은 복음의 척추다.
넘어진 원 가지가 회개하면 다시 접붙임을 받으리라는 약속은 회복의 문이 결코 닫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복을 세상의 생명으로, 마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에 비유한다. 언약의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진액이 다시 원 가지로 역류하는 그림이다. 이 때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종말론적 선언이 부각된다. 구체적 시간표를 단정하려는 유혹을 경계하면서도, 언약의 방향성이 배제와 폐기가 아니라 회복과 포용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일시적 불충으로 취소되지 않음을 말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언약사적 시선을 제안한다. 역사는 곧 언약의 실행 무대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좌절까지도 섭리의 장치로 엮어 결국 선을 빚어내신다. 신학은 이 섭리의 문법을 해석하고, 윤리는 이 섭리의 문법을 살아내는 기술이다. 그래서 바울의 송영-"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은 논증의 탈출구가 아니라 논증의 꼭짓점이다. 이 경외가 사라질 때, 교리는 메마른 체계로, 실천은 프로그램으로 쪼그라든다.
오늘의 신앙현장에 이 원리를 옮겨오면,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은 구체적이다. 은혜를 은혜로 기억하는 공동체는 자신들의 번영을 자격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부흥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며, 선물은 자랑이 아니라 봉사의 계기다. 어느 시대든 교회는 교만으로 꺾일 수 있고, 그 빈자리를 돌감람나무 가지-즉 변두리의 사람들, 소외되었던 집단, 주변부의 목소리-가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뿌리의 은혜를 망각하면 같은 실패의 궤적을 밟는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복음은 반복을 학습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나게 함"이라는 난해한 표현을 배타의 감정이 아니라 거룩한 경쟁의 동력으로 번역해야 한다. 타자에게서 드러난 은혜를 보고 우리의 불신앙을 알아차리고, 그 시기심을 회개와 갱신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질투가 질서를 무너뜨리기 전에, 시기가 영적 각성으로 변환되도록 의지를 보태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의 자리는 방심의 거처가 아니다. "네가 믿음으로 서 있다면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는 경고를 일상의 덕목으로 번역해야 한다. 두려움은 위축이 아니라 경외의 다른 말이다. 경외는 우리의 확신을 절제하게 하고, 절제는 우리의 말과 행위를 정화한다. 신앙의 성숙은 거창한 수사보다 조용한 절제에서 확인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절제가 개인의 윤리에서 공동체의 질서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도자는 권위를 행사하기 전에 은혜의 빚을 기억해야 하고, 구성원은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받은 사랑을 환기해야 한다. 이 상호 기억이 교회의 면역체계를 강화한다. 남은 자의 비밀은 초월적 소수가 아니라, 일상에서 은혜를 잊지 않기로 결심한 평범한 신자들의 결정에서 탄생한다.
종말론적 전망에서 바울의 문장은 넓어진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는 시간 표현은, 하나님이 각 시대·각 민족을 향해 갖고 계신 선교적 의지를 비춘다. 장재형목사는 이 표현을 선교 통계나 시간표로 소진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만나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 성취해야 할 윤리적 과제로 읽자고 권한다. 충만은 숫자의 합이 아니라 사랑의 밀도다. 교회가 제도적 성과를 과시하는 순간, 충만의 밀도는 오히려 희박해진다. 반대로 작은 친절, 공적 영역에서의 정직, 타자에 대한 환대가 촘촘히 쌓일 때 충만은 눈에 보이지 않게 부풀어 오른다. 그 밀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설 때, 지역은 교회 때문에 안전해지고 사회는 복음 때문에 더 인간다워진다. 이 충만은 측정되기보다 체감된다. 그래서 바울의 송영은 증명의 문장이 아니라 체감의 탄성이다.
학문적으로 보자면 로마서 9-11장은 선택과 유기의 난제를 한꺼번에 끌어안는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이 난제가 차갑게 계산될 문제가 아니라 뜨겁게 예배할 주제라고 일깨운다. 선택은 특권을 휘두를 자격증이 아니라 섬기라는 위임장이고, 유기는 타자를 지워버리라는 허가장이 아니라 스스로를 살피라는 경고장이다. 선택이 특권으로 변질될 때 하나님은 변두리에서 돌감람나무 가지를 불러 중심을 갱신하신다. 유기가 정죄의 언어로 오용될 때 복음은 즉시 그 언어를 회개의 호소로 번역한다. 선택과 유기의 올바른 길은 결국 하나다. 은혜를 기억하고, 겸손을 배우고, 회복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 세 단어가 교리를 생활로, 생활을 증언으로, 증언을 예배로 이어준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이 메시지는 풍성하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의 기억을 갖고 있고, 그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죄책감으로 엮으려 든다. 하지만 감람나무의 비유를 내면화하면, 실패의 기억은 뿌리에 더 깊이 접붙임 받는 동기가 된다. 뿌리가 우리를 보전한다는 사실은, 내 실적의 기복이 신앙의 기복을 결정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할 일은 뿌리의 진액이 흐르도록 방해물을 치우는 일이다. 낡은 자의식, 방어적 태도, 자기연민, 억울함의 원한 같은 것들이 관을 막는다. 그 관을 열어 놓으면, 진액은 반드시 흐른다. 은혜는 언제나 먼저 움직인다. 우리는 그 움직임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쪽으로 결심하면 된다.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적용은 분명하다. 교회가 특정 전통이나 영향력, 과거의 성취를 안전자산으로 착각하는 순간부터 꺾임은 시작된다. 그때 하나님은 변두리에서 "시기나게 할" 타자의 증언을 들려주신다. 낯선 예배의 언어, 새로운 문화권의 신자들, 아직 신학 체계가 덜 정리된 청년의 거친 기도 속에서 우리는 오래 잊고 지낸 생기를 본다. 그 생기를 질서 이름으로 눌러버리기보다, 질서의 본래 목적-생명을 보호하고 키우는 일-을 기억하면 교회는 다시 살아난다. 바울의 구도에 비추어 보면, 건강한 시기심은 중심을 중심답게 만들고, 건강한 겸손은 변두리를 변두리답지 않게 만든다. 결국 중심과 변두리가 함께 주님께 접붙임 받아 같은 진액을 나누는 것이 교회의 아름다움이다.
이 모든 사유의 종착점에서 우리는 다시 장재형목사의 강조점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실패로만, 인간의 성공을 성공으로만 두지 않으신다. 실패는 회복의 재료가 되고 성공은 섬김의 자원이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11장을 공부하는 일은 지식을 늘리는 활동이 아니라 해석의 품격을 높이는 훈련이다. 역사의 비극 앞에서 서둘러 단정하지 않고, 개인의 넘어짐 앞에서 서둘러 단죄하지 않으며, 공동체의 쇠퇴 앞에서 서둘러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 태도가 곧 복음의 온도다. 그 온도로 자신을, 교회를, 사회를 데우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바울과 함께 송영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 선언은 우주의 형이상학일 뿐 아니라 오늘의 생활철학이다. 출근과 퇴근, 시작과 마감, 기획과 실행, 사랑과 이별-all are of Him, through Him, to Him. 그 인식이 깊어질수록, 신앙은 설명을 넘어 노래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