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의 로마서 설교를 읽다 보면 바울이 기록한 고대의 문장이 지금 우리 시대의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로마서 1장 8절부터 15절까지를 풀어내는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시선은, 단순한 성경 주석을 넘어서 한 사도가 어떤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했고,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정밀하게 포착해 줍니다. 그리고 그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양도 비추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때, 장재형목사라는 이름은 단순한 설교자의 이름을 넘어서, 바울의 심장을 우리에게 번역해 주는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울의 감사입니다. 그는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원래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확신하던 사람에게, 로마는 누구보다 먼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전략적 최우선 선교지"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장재형목사의 해석 속에서 바울은 전혀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기 전에 누가 먼저 로마에 들어가 버렸네"라고 서운해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전해야 할 그 땅에 이미 복음이 전해졌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넓은 가슴을 강조합니다. 이름도 남지 않은 누군가가 먼저 씨앗을 뿌렸지만, 사도는 그를 시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 태도 자체가 이미 복음의 열매입니다.
이 장면을 떠올리다 보면 장 프랑수아 밀레의 명화 「이삭 줍는 여인들」이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누군가 수고하여 거둔 큰 추수 뒤에, 이름 없는 여인들이 조용히 이삭을 줍듯, 로마 교회도 누가 처음 복음을 들려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믿음이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자라났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마치 그 여인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화가의 시선처럼, 먼저 수고한 사람들, 이름 없는 선교의 주체들을 향해 바울과 함께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태도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사람들을 통해 자라나는지 보여주는 가장 정교한 영적 풍경화가 됩니다.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육안으로 볼 때는 하찮아 보이는 한 알에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에 복음이 도달한 사실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확장력"과 "전파력"을 강조합니다. 죄의 전염성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전염성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깊고 강하게 퍼져 나가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 표면에서는 파도와 바람이 제멋대로 부는 것 같지만, 깊은 곳에서는 거대한 해류가 묵묵히 한 방향으로 흘러가듯, 역사의 표면 위에는 혼란과 우연이 가득해 보이지만, 그 심층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일정한 방향으로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통찰입니다.
이런 시각은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사울의 회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말에서 떨어지는 사울은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지만, 캔버스 전체를 관통하는 빛은 한 방향으로만 흐릅니다. 인간이 볼 때는 "길이 막힌 것" 같아도,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이미 복음의 큰 흐름이 설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그 거대한 역사 안으로 우리도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 흐름 안에 불려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이유를 조용히 짚어 줍니다.
로마서를 "기도로 쓴 편지"라고 표현하는 장재형목사의 해석 역시 인상적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항상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언어를 따라가며, 초대교회의 교제 방식이 단지 얼굴을 맞대는 수준이 아니라, 기도로 서로를 영적으로 품는 깊은 연대였음을 강조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우리가 잠시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라고 말하는 장면을 상기시키며, 실제 거리와 상관없이 마음이 이어지는 사랑의 네트워크를 보여 줍니다.
이 지점에서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화면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빛의 조직, 구도, 시선의 흐름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냅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기도 안에서 묶여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시각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내가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고, 내가 전도한 성도가 아니더라도, 이미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도시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넓은 마음, 그것이 진짜 사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고 싶어 하면서도 자꾸 "길이 막힌"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장재형목사의 해석은 역사와 신학을 동시에 포괄합니다. 그는 먼저 바울 안에 있었던 "예루살렘 퍼스트 정신"을 강조합니다. 이방 교회가 아무리 성장해도, 그는 자신이 신앙을 물려받은 모교회, 곧 예루살렘 교회와의 연대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방 교회들이 모은 헌금을 "은혜의 헌금"이라 부르며, 영적인 것을 먼저 나눠 준 예루살렘을 육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한 세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의 세계"라는 에큐메니컬 정신의 뿌리를 봅니다. 마치 콤파스로 큰 원을 그리기 전에, 먼저 중심점에 정확히 촉을 박아 두어야 하듯, 바울은 세계 선교의 원을 그리기 전에 예루살렘과의 영적 중심축을 견고히 세우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 에큐메니컬한 시선은 라파엘로의 「성체 논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화면 위쪽의 삼위 하나님과 아래쪽의 다양한 교부, 신학자들, 평신도들이 하나의 원을 이루며 성찬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시대와 지역, 사상적 차이를 넘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비전이 그림 속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장재형목사의 로마서 강해 역시 이와 비슷한 구도를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이미 복음을 받은 자와 이제 막 복음을 들은 자, 사도와 이름 없는 성도들까지 모두가 하나의 원 안에서 엮여 있는 "한 세계"로 그려집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려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장재형목사는 "재교육"과 "견고하게 함"을 이야기합니다. 이방 교회 안에는 환난도 많고, 거짓된 가르침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사람을 많이 전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며 그들의 믿음을 다지고, 복음의 핵심을 다시 정렬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책망하셨던 장면을 떠올리며, 장재형목사는 "전도 이후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그가 묘사하는 바울은, 한 번 맺은 관계를 끝까지 품고 책임지는 사람, 다시 돌아가서 붙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의 마음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떠났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단지 "돌아온 것"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품에 안고 회복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 주며 그의 존재 전체를 다시 세워 줍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을 향한 태도 역시 이와 닮아 있습니다. 한 번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떠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 신앙을 세우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복음의 중심을 재확인해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변화된 바리새인"의 진짜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으로 사람을 누르던 사람이, 이제는 은혜로 사람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한다"는 구절에 이르면, 장재형목사의 설명은 더 섬세해집니다.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은사"가 마치 특별한 비밀 계시나 새롭고 독점적인 무언가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는 이 구절을 그렇게 좁게 묶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와 로마서 12장을 함께 읽으며, 성령께서 교회 안에 흩어 주신 다양한 은총, 경험, 간증, 지혜, 가르침, 위로의 언어들 전체가 "신령한 은사"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 상호성의 구조는 러시아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삼위일체」(일명 '손님 접대하는 아브라함') 아이콘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 위격이 둥근 원을 이루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 그 중심에는 열린 자리 하나가 남겨져 있습니다. 위계적인 피라미드가 아니라, 사랑으로 둘러앉은 원형의 식탁입니다. 장재형목사가 그리는 교회도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사도가 위에서 명령하고, 평신도가 아래에서 수동적으로 받는 구조가 아니라, 각 사람이 받은 은사를 서로 나누며 "피차" 위로를 얻는 원형 구조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수직적이거나 삼각형적인 구조가 아니라 원형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알도, 지구도, 우주의 많은 근원적인 것들이 둥그렇듯, 사랑을 본떠 창조된 세계가 원형의 구조를 띤 것처럼, 교회 역시 사랑이 흐르는 곳에서는 원형성을 되찾게 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바울의 고백을 해석하는 장재형목사의 시선에는, 복음의 심장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리새인이었던 시절, 바울은 "내가 한 선행은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계산법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공로를 쌓고, 그 공로에 대한 보상을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그의 계산법은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빚"으로 지고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것도 지지 말라"는 구절과 함께 이 대목을 읽어 줍니다. 여기서 "사랑의 빚"은 피해야 할 채무가 아니라, 이미 지고 있는 은혜의 빚, 기꺼이 지고 살아야 하는 복음의 빚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 자체가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생명이라면, 우리는 이미 사랑의 부채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까지 고백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억지로 떠밀려 하는 의무감이라기보다, 사랑의 빚을 자각한 사람이 가지게 되는 내적 필연성으로 설명합니다. 이미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 사랑의 빚을 떠올릴 때,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 다시 한번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무릎 꿇은 아들과, 그를 감싸 안은 아버지의 손, 빛과 어둠의 대비 속에서 우리는 "내가 나 된 것은 전적으로 은혜 때문"이라는 진술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 아들은 평생 아버지께 빚진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빚은 수치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명화된 헬라인이든, 야만인이라 불리는 이방인이든, 지혜 있는 자든, 어리석은 자든, 모두에게 자신이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고백을 통해, 복음이 특정 계층이나 문화에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할 "보편적 선물"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할 때, 장재형목사는 이 "복음"을 단순히 한두 문장으로 요약되는 교리 공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내 안에 허락된 깊은 사랑과 은혜의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읽습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 쌓인 수많은 교회의 이야기, 눈물과 기쁨, 실패와 회복, 수많은 신령한 은사와 간증들을 로마 교회와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로마 교회가 가지고 있는 풍성한 믿음의 이야기들을 자신도 나눠 받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상호 나눔의 비전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장재형목사의 로마서 설교와 로마서 강해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지 한 본문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복음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먼저 수고한 이름 없는 이들을 향한 감사, 아직 만나지 못한 교회를 향한 끊임없는 중보,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다시 찾아가 견고하게 세우려는 책임감,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를 하나로 묶으려는 연합의 정신, 사랑의 빚을 자각한 자만이 가지는 겸손과 열정, 그리고 "피차 안위함"을 꿈꾸는 원형적 교회에 대한 갈망. 이것이 장재형목사의 설교 속에 녹아 있는 로마서의 영적 지형입니다.
우리 각자도 바울처럼, 그리고 장재형목사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나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이웃과 민족과 열방 모두에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내게 허락된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