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1장 27-32절은 인간의 윤리적 붕괴를 "개별 행위의 나열"이 아니라 "예배의 붕괴가 낳는 존재론적 붕괴"로 읽게 만드는 본문이다. 장재형( Olivet University)목사의 설교문은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죄의 현상학을 열거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왜 인간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지, 그 무너짐이 어떤 내적 순서로 진행되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복음이 무엇을 회복시키는지까지 한 호흡으로 끌고 간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단지 로마라는 고대 도시의 풍속사를 고발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하나님을 밀어내고도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던져지는 영적 진단서이며, 장재형목사는 그 진단서를 오늘의 언어로 읽어내려 한다.
본문의 문장 구조만 보아도 바울의 논리적 도식이 드러난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사..."라는 선언은 단순한 감정적 탄식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냉정한 연결이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강조하듯, '불경건'은 도덕 문제의 한 항목이 아니라 도덕 문제를 낳는 뿌리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순간 인간은 가치의 중심도 잃고, 기준의 근거도 잃고, 결국 욕망이 주인이 되는 질서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바울이 묘사하는 타락이 "어느 날 갑자기 덮쳐오는 외부의 폭풍"이 아니라 "내면의 방향 상실"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우상에 빠지면 우상에게 종속된다. 종속이란 단순히 어떤 취미나 집착이 커지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이 붙들려야 할 궁극적 대상을 잃고 그 빈자리를 대체물로 봉합하려는 강박이 삶의 운전대가 되는 상태다.
그래서 설교는 "왜 사람은 하나님을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갈망하는가"라는 모순을 정면으로 다룬다.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마음의 거부가 가장 강할 때 영혼의 허전함은 가장 날카롭게 솟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허전함을 단순한 심리적 결핍이 아니라 영혼의 구조적 결핍으로 본다. 사람은 자기 존재의 근원과 분리될 때 비어버린다. 비어버린 영혼은 채우려 한다. 문제는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아니라, 채우려는 방식 자체가 왜곡되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 자리를 채우려는 시도는 언제나 과잉을 부른다. 더 강한 자극, 더 빠른 만족, 더 짧은 쾌락이 필요해진다. 충족이 아니라 둔감화가 일어나고, 둔감화는 더 큰 자극을 요구한다. 이 악순환이야말로 바울이 말하는 "그 상실한 마음"의 그림자이며,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점점 더 멸망으로 치닫는 과정"의 실체다.
바울은 그 과정이 윤리의 파괴로 표출된다고 말한다. 롬 1:29-31의 죄목록은 인간 사회의 병리학적 백과사전처럼 촘촘하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함, 비방,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 거역, 배약, 무정, 무자비.... 이 목록의 무서움은 "극단적 범죄만" 열거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일상적 관계의 균열을 낳는 언어의 죄(수군수군, 비방)부터 공동체의 신뢰를 붕괴시키는 죄(사기, 배약), 그리고 생명을 직접 파괴하는 죄(살인)까지 한 줄에 엮어 놓는다. 이는 죄가 특정 영역에 국한된 오염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인간의 마음이 전체적으로 썩어들어가는 총체적 부패임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종교적 타락은 반드시 도덕적 타락을 가져온다"고 말할 때, 그 '반드시'라는 단어는 도덕주의적 엄포가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비극적 관찰에 가깝다. 예배가 무너지면 가치가 무너지고, 가치가 무너지면 관계가 무너지고, 관계가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진다.
여기서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흔히 오해되는 지점을 바로잡는다. 하나님 없이도 그럴듯한 선행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가능해 보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영광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인간의 선의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함의 근거와 방향을 따지는 신학적 질문이다. 무엇이 선이며 왜 선한가, 선을 선이라 부르게 하는 궁극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을 지평에서 지우면 선은 취향이나 합의로 축소되기 쉽다. 합의가 바뀌면 선도 바뀐다. 그때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를 자유로 착각하지만, 실상은 그때그때의 분위기와 욕망, 집단 심리의 파도에 휩쓸리는 또 다른 종속 상태로 빠지기 쉽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심"은 방임의 무관심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방향이 결국 인간을 어떻게 만드는지 스스로 경험하게 하는 심판의 방식으로도 읽힌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영적 법칙을 자연 현상에 비유한다. 햇살이 사라지면 냉기가 오고, 바람이 멎으면 부패가 시작된다.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질수록 생명은 마르고 썩는다.
롬 1:27을 둘러싼 논쟁적 주제도 피하지 않는다. 다만 이 본문을 다룰 때 가장 먼저 붙잡아야 할 것은 "바울이 특정 소수만 겨냥하는가"가 아니라 "바울이 무엇을 죄의 뿌리로 지목하는가"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외면한 인간이 욕망의 질서를 뒤집는 모습을 언급한다. 장재형목사의 설교 역시 창조 질서, 곧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관계의 틀을 주셨다는 전제 위에서 '순리'라는 표현을 해석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대목이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혐오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바울이 이어서 쏟아내는 죄목록은 사실상 모든 인간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진단은 늘 인간을 둘로 나누어 한쪽을 안전지대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너도 그들 중 하나"라고 말하며, 죄를 지적하는 손가락이 결국 자기 가슴을 향하도록 돌려놓는다. 장재형목사의 설교를 오늘에 적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성 윤리의 논의가 필요하더라도, 그 논의는 언제나 회개와 겸손, 그리고 상처 입은 사람을 향한 책임 있는 사랑이라는 토양 위에서만 가능하다. 도덕을 말하면서 사람을 부수면, 우리는 이미 롬 1이 열거하는 죄의 목록-악독, 무정, 무자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버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축은 "사랑의 질서"다. 그는 아가페와 에로스의 대비를 통해,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의 사랑이 왜 쉽게 욕망의 거래로 타락하는지 설명한다. 아가페는 상대를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살리는 사랑이고, 에로스는 본래 아름다울 수 있으나 영적 기초를 잃으면 쉽게 자기 충족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여기서 설교는 인간의 성(性)을 단순한 금지 목록으로 다루지 않고, 사랑의 근원과 방향을 회복하는 문제로 다룬다. 성은 인간의 깊은 영역이며, 깊은 영역은 깊은 기초 위에서만 건강하게 놓인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일은 단지 종교적 의례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초를 다시 놓는 일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경건이 회복되면 도덕적 회복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어떤 시대에도 값싸게 소비될 수 없는 문장이다. 도덕은 설교 한 편으로 '교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배의 중심이 회복될 때 삶의 질서가 서서히 재정렬되는 것은, 신앙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증언이다.
이 본문을 오늘의 풍경 속에서 읽으면 '우상'의 형태가 얼마나 정교해졌는지도 보인다. 고대의 우상은 신전과 조각상으로 시각화되었지만, 현대의 우상은 더 내면적이고 더 세련된 언어를 입는다. 성취를 신격화하는 능력주의, 소비를 구원처럼 약속하는 광고, 자아를 절대화하는 자기숭배, 즉각적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만드는 쾌락주의, 분노를 정의로 위장하는 집단적 공격성.... 이런 우상들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삶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고대의 우상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장재형목사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할 때, 그 비유는 단지 무신론 비판을 넘어선다. 인간은 의미와 궁극을 지워버릴 수 없다. 지운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영혼은 질문한다. 내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왜 사랑이 필요한가, 왜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는가. 그 질문을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마음은 더 강한 자극으로 질문을 덮으려 한다. 그때 바울이 말한 "상실한 마음"은 단지 지적 능력의 저하가 아니라, 진실을 마주할 용기의 상실이며, 영혼이 자기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시작하는 상태다.
바울은 마지막에 더 날카로운 진단을 더한다.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죄는 개인적 실수에 머물 때보다, 공동체적 승인과 박수 속에 들어갈 때 더 완강해진다.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보다, 죄를 죄라 부르지 못하게 되는 순간 더 깊이 무너진다. 그래서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도덕적 타락의 쓰나미"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타락이 개인의 은밀한 방에서 끝나지 않고 문화와 제도, 언어와 농담,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번져가는 모습을 경고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재단해 내쫓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무엇을 정상이라 부르며 무엇을 아름답다 부르며 무엇을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지 점검하라는 요청이다. 그 점검은 신앙의 이름으로 타인을 관리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는 점검이기도 하다.
이 모든 논의를 한 장면으로 응축해 보여주는 명화가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삼면화 '쾌락의 정원'은 에덴의 평온에서 시작해 인간 욕망의 향연을 거쳐 지옥의 음울함으로 흘러가는 구성을 통해, 욕망이 질서와 경외를 잃을 때 어떤 종말에 이르는지 시각적 설교처럼 보여준다. 그림 속 인물들은 금방이라도 영원할 것 같은 유희 속에 있지만, 그 유희는 방향을 잃은 자유이며, 결국 파괴의 이미지로 수렴한다. 바울이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고 말할 때, 그 '보응'은 언제나 외부에서 떨어지는 번개만이 아니라, 욕망이 욕망을 먹어치우며 인간을 안쪽에서부터 소진시키는 자가파괴로도 나타난다. 장재형목사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외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이, 보스의 그림에서는 찬란한 색채 뒤편의 공허로 드러난다. 그 공허는 현대인의 삶에도 낯설지 않다. 더 많이 소유해도 더 목마르고, 더 빠르게 즐겨도 더 허전한 아이러니가 바로 그 공허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을 설교하는 목적이 절망을 늘어놓는 데만 있다면, 그것은 복음의 방향을 잃은 설교가 된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끝내 도달하려는 지점은 "사형선고"라는 단어의 무게를 통해 오히려 구원의 은혜를 더 선명히 드러내는 데 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사실을 가볍게 만들면, 십자가는 장식품이 된다. 반대로 사망의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면, 십자가는 단지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살길'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히브리서의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라는 문장을 끌어와, 인간이 결국 결산의 자리 앞에 선다는 사실을 직면시키려 한다. 이는 공포 마케팅이 아니라, 인생을 진지하게 살게 하는 영적 각성의 언어다. 죽음이 끝이라 믿는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불안해진다. 영혼은 안다. 끝이 아니라는 것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사랑을 배반한 삶이 그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설교를 다시 읽을 때, 핵심은 "비난의 확성기"가 아니라 "회복의 길"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던 인간이 다시 하나님을 마음에 두게 되는 길, 상실한 마음이 새로워지는 길, 욕망의 도구가 되어버린 몸이 다시 "의의 병기"가 되는 길이 복음의 길이다. 그 길은 자기계발의 조언으로 열리지 않는다. 바울이 로마서 서두에서 말하듯,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붙드실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붙드는 거짓된 손에서 풀려난다. 그렇기에 도덕의 회복은 언제나 영적 회복의 열매로 자라난다. 잔가지를 억지로 묶는다고 생명이 돌아오지 않는다. 뿌리에 물이 들어가야 잎이 펴지고 꽃이 핀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과의 문제를 풀기 전에, 욕망과 습관을 바로잡기 전에, 먼저 예배의 중심을 다시 세우라는 것이다.
오늘의 독자는 이 설교를 읽으며 두 가지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는 "세상이 타락했으니 나는 안전하다"는 도덕적 우월감이고, 다른 하나는 "어차피 인간은 다 똑같다"는 체념이다. 로마서 1장은 우월감을 허물고 체념을 거부한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진단은, 모두를 정죄하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일한 구원의 문을 열기 위한 전제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강한 어휘로 시대를 고발할 때에도, 그 목적은 사람을 절망으로 밀어넣기보다 하나님께 돌아갈 이유를 분명히 세우는 데 있다. 영혼의 소리를 끝까지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선택이며, 그 억압이 반복될수록 마음은 더 둔감해진다. 그러니 복음은 "지금 돌아오라"는 부름이다. 지금 하나님을 마음에 두라. 지금 진리를 불편해도 진리라 부르라. 지금 미워하는 대신 회개하라. 지금 자기 합리화 대신 하나님의 빛 앞에 서라.
결국 롬 1:27-32는 죄의 심연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복음의 필요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본문이다. 바울은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그 무너짐이 단지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문제임을 밝힌다.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이 구조를 따라가며,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허전함"이라는 심리적 언어와 "우상숭배와 상실한 마음"이라는 신학적 언어를 결합해, 독자가 자신의 삶을 성찰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 성찰의 결론은 단순하다. 하나님 없는 자유는 결국 더 큰 종속을 낳고, 하나님 안에서의 순종은 오히려 인간을 참된 인간으로 회복시킨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도구가 아니라 인격으로 대할 수 있고, 사랑을 욕망의 거래가 아니라 생명의 선물로 다룰 수 있다. 그것이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1장을 통해 끝내 말하고자 하는 길이며, 오늘 이 시대가 잃어버린 방향감각을 되찾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