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이 짙게 깔린 황량한 길 위를 걷는 한 나그네를 상상해 봅니다. 그는 목적지를 잃었고, 발바닥은 갈라졌으며, 입에서는 거친 탄식이 쏟아져 나옵니다. 성경은 이 비극적인 풍경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롬 3:16). 이는 단순히 미래에 닥칠 형벌을 예고하는 협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나침반을 상실한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실존적 고통을 묘사한 진단서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괜찮다"고 자위하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을 통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며 우리의 가면을 벗겨냅니다. 오늘 우리는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의 로마서 3장 9-20절 강해 설교를 길잡이 삼아,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죄의 뿌리를 추적하고 그 끝에서 만나는 십자가의 역설적인 은혜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열린 무덤과 같은 입, 그 서늘한 절망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그 누구도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매우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죄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칭의(Justification)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성화(Sanctification)는 평생에 걸친 치열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말씀들은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전방위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워버린 인간은 곧바로 언어의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는 표현은 섬뜩하리만큼 정확합니다.
마음이 썩으면 입에서 부패한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야고보서의 경고처럼,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인생 전체를 불태우는 지옥 불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거룩한 단어로 포장된 비난과 정죄를 쏟아내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죄를 짓는 데는 발걸음이 너무나 재빠르나, 선한 일에는 늘 머뭇거리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눈, 독을 품은 혀, 피 흘리는 데 빠른 발.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파멸과 고생'입니다. 율법은 이 참혹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거울은 얼굴의 검댕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씻겨주지는 못합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입을 다물게 되고,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시인하게 됩니다.
찢겨진 신발 한 짝, 렘브란트의 캔버스 위에 흐르는 눈물
이 지점에서 우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가 남긴 불후의 명작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림 속 탕자의 모습은 로마서가 말하는 "파멸과 고생"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는 삭발한 듯 밀려 있고,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으며,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그의 벗겨진 왼쪽 발과 닳아 빠진 오른쪽 샌들입니다. 그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파멸의 길'이었는지를 찢겨진 신발이웅변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챙겨 당당하게 떠났지만, 하나님(아버지)을 떠난 삶의 결론은 돼지 쥐엄열매조차 얻기 힘든 비참함이었습니다.
설교에서 장재형 목사가 언급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와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이 그림과 깊이 공명합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혀에 물 한 방울만 찍어 달라"고 애원했던 그 타는 갈증은, 아버지의 품을 떠난 모든 영혼이 겪는 본질적인 고통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탕자는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그를 감싸 안은 아버지의 두 손은 율법의 정죄가 아닌, 덮어줌과 용서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율법은 탕자에게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하며 입을 막아버리지만, 바로 그 침묵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절망이 깊을수록,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의 빛은 더욱 선명해지는 법입니다.
포도주에 옷을 빨며: 매일 다시 입어야 할 은혜의 두루마기
그렇다면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탕자가 돌아와 새 옷을 입었듯, 우리도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창세기의 노아 이야기를 통해 엄중한 경고를 잊지 않습니다. 홍수 심판을 견뎌낸 의인 노아조차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죄의 진흙탕에 뒹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함처럼 누군가의 허물을 보고 비웃거나 정죄하는 교만이 아니라, 셈과 야벳처럼 그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며, 무엇보다 자신의 옷을 날마다 빠는 겸손함입니다.
창세기 49장, 야곱의 예언 속에 등장하는 "그의 옷을 포도주에 빨며"라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22장의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과 절묘하게 연결됩니다. 신앙생활은 한 번의 세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걷다 보면 우리의 발과 옷자락에는 필연적으로 죄의 먼지가 묻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포도주에 우리의 행실과 언어, 마음을 담가 빨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입니다.
파멸과 고생의 길에서 평안과 생명의 길로 돌이키는 힘은 우리 내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바울의 탄식은 패배의 고백이 아니라, 은혜를 갈망하는 자의 가장 정직한 기도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설교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죄가 죄로 보여야 은혜가 은혜로 보입니다. 오늘 하루, 내 입술이 독사의 독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내 발이 이기적인 욕망을 향해 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다시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파멸의 길을 멈추고 은혜의 길로 들어서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누려야 할 최고의 복음입니다.
















